알라딘서재

1
앨리스님의 서재
  •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 14,850원 (10%820)
  • 2020-02-03
  • : 1,264
지복의 성자는 처참한 피를 머금은 흙 위에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물을 뿌려 피워낸 비통한 꽃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혹독한 밤을 겨우 이겨낸 새벽의 풀처럼 이파리 사이로 애통한 이슬을 떨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인식하고 싶지 않았던, 이 소설이 진술하고 있는 인도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했다. 아룬다티 로이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또는 종교의 차이로 인도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하고 악랄한 범죄에 유려한 문체를 발라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우리 앞에 내놨다. 거짓으로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루머에 불과했어야 마땅한 진실이라고. 그래서 나에게 이 소설은 르포이자 또한 처절한 고발이기도 했다. 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 단말마는 다양한 극 중 인물들을 통해 다각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누구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모 여대의 트레스젠더 입학 이슈에 사회가 떠들썩했다. 그전에는 군 복무 중 성전환한 군인의 일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안줌이 겹쳐 보였다. 발밑에 뿌려진 유리조각에 발을 다치면서도 가볍게 춤추며 지나가는 것 같은 안줌의 삶과 그녀들의 용기가 내 마음을 울렸다.
또한 나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떠올랐다. 나는 등장인물 중 안줌의 삶이 나와 제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스젠더 여성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성인이 돼서야 만난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 때문일 것이다.
“너를 임신했을 때 나는 당연히 아들이라 생각했어. 아들을 낳고 싶었지. 하지만 간호사가 딸이라며 너를 내민 거야. 그래서 저리 치워버리라고 했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버림받은 건 어릴 때가 아니라 태어났을 때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내 존재 자체가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안줌처럼 상처가 바람처럼 나를 지나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마치 빽빽한 숲에서 간벌당하는 나무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나도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지워도 되는 존재 같았다. 나와 같은 여자들의 이야기들도 이 소설에서 가슴 아프게 표현되어 있다. 아주 짧은 문장으로, 반복되면서.
성 정체성, 계급, 성별, 종교에 따른 차별과 폭력, 정치의 실패와 부재, 개인의 잔혹함까지 아룬다티 로이는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나를 혼돈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꽃씨는 양분만 있다면 어디서나 자라는 법, 그곳이 설령 시체의 산이라도 말이다. 작가는 인간이 가진 숭고한 힘을 정말 세심하게 풀어냈다. 그것은 절망과 비탄에서 찾아낸 것. 그 기적을 이뤄내는 비밀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