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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부자
  • 가족각본
  • 김지혜
  • 15,300원 (10%850)
  • 2023-08-01
  • : 3,149
며느리가 들어오면 “우리 식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당신은 이제부터 우리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할 일원이라면서 집안의 온갖 미션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며느리로서 해내야 할 수행과제들은 상당한 적극성을 필요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내에서 며느리의 위치는 언제나 최하위에 자리한다. 식구라면서, 주어지는 역할은 식모와 다를 바 없다. 말이 좋아 며느리지 실상은 공짜로 부리는 가사노동자일 뿐이다.

며느리는 명절이 되면 하루 종일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남의 집안 제사상을 차린다. 김장철에 식구들이 아랫목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며느리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배추를 버무린다. 가족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와 설거지를 도맡는 것 또한 온전히 며느리의 몫이다. 이뿐인가? 자녀가 없으면 "언제 애 낳을 거냐"는 핀잔까지 감내해야 한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극진히 대접해주면서 왜 며느리에게만 무급의 강제 노동을 요구하는가. 며느리가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유교적 가족은 이제 해체될 때가 됐다. 아니,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며느리가 남자라니”를 외치는 이 땅의 기성세대들은 가족의 해체를 두려워 하는듯하다. 그들이 내놓은 정책을 보면 어이가 없어 기가 찰 노릇이다.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고작 몇십, 몇백만 원의 지원금을 던져주며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협상의 여지도 없는 쓰레기 같은 거래다. 내 커리어와 건강을 전부 포기하는 대가가 고작 그정도라니.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면 책상이 사라져있고, 비상식적으로 치솟는 물가 때문에 혼자 먹고 사는 것도 벅찬 현실 속에서 출산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낮다며 여성들에게 임출육을 당당히 요구하는 그들의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설령 출산을 결심했다 치자. 어렵게 열 달을 버티고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 끝에 아이를 출산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이런 말을 듣는다. “요즘엔 딸이 최고야~” 여기서 ‘요즘’ 딸이 최고라는 말은 무뚝뚝한 아들보다 살갑고 애교많고 집안일도 척척 도울 줄 알고 나중에 부모 아프면 간병도 잘 해줄 딸이 최고라는 거다. 반면,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대를 이을 장남! 이라며 온 가족이 얼씨구나 좋다 잔치를 벌인다. 아들은 그저 존재만으로 든든해서 좋단다. 태어난지 하루 된 신생아에게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돌봄 노동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회라니. 이 얼마나 기괴한가. 이러한 기성세대의 행태를 지켜보며 자란 지금의 여성들이 출산을 선택할것 같은가? 출산율이 0.7이라는 수치에 겁먹을 것 같은가? 어림도 없지.

출산의 전 과정을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해도 아이를 낳을까 말까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시의원이라는 자는 여성의 케겔운동을 저출산 대책이라며 내놓는다. 언제까지 여성을 출산 기계 취급하며 출산율을 논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유교적 정상 가족의 틀이 부서지며 돌봄과 연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을 것이다. 가족의 의미는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희생이 미덕이 되는 세상은 끝났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유지되는 가족이라면 그런 가족은 더 이상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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