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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아님의 서재
  • 간단후쿠
  • 김숨
  • 15,300원 (10%850)
  • 2025-09-12
  • : 2,855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숨 / 간단후쿠 


To 디어 요코


앗, 너는 요코가 아니지. 그 이름은 죽은 선대 요코한테서 물려받은 이름일 뿐이니까.


죽은 요코도 착하지 않다. 그녀는 날 스즈랑에 데려다 놓았다. 죽으면 죽은 자신을 대신할 여자애가 있어야 하니까. 죽은 자신을 대신해 군인들을 데리고 잘 여자애가. (88)


친애하는 요코.

그냥 널 요코라 부를게. 왜냐하면 널 사서 만주로 데리고 온 오토상도, 일본인 군인들과 자는 스즈랑의 조선인 여자애들인 ‘조센삐’들도 모두 다 너를 요코라 부르니까. ‘개나리’라는 조선 여자애 이름은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불리워진 적이 없으니까.


나는 이름이 네 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인 개나리, 오토상이 지어 준 이름인 요코, 전투를 앞둔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교코,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아이코. 이름은 영혼이다. 몸이 아프면 영혼들도 아프다. (117)

스즈랑에서 이름이 가장 많은 여자애는 아유미다. 그녀는 이름이 여섯 개나 된다.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인 미자, 오토상이 지어 준 아유미, 스즈랑에 온 첫날 그녀를 데리고 잔 늙은 장교가 지어 준 이름인 이케미, 북쪽에서 온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유미코, 헌병이 지어 준 게이코, 서쪽에서 온 군인이 지어 준 이름인 사와야카. (126)


요코, 네가 열세 살인지, 스무 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아이를 배고 있는지, 다행히 지금은 임신이 아니래도 그건 중요하지 않지. 단지 귀에 걸리는 말들은, 네가 무수히 말하는 아래(생식기)라는 말, 삿쿠(콘돔)라는 말, 그리고 군인들의 콧물(정액)과 요코네(성병)라는 말. 그 말들은 쉽게 삼켜지지가 않아서. 책 속에서 ‘군인들을 데리고 잔’ 얘기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 말들이 줄줄이 나와도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했어. 천황의 군인들을 품을 수 있는 아래만 있으면 너의 이름이 무언지 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오토상은 내가 계속 군인을 데리고 자게 한다. 열에 둘은 내가 아기 가진 걸 모르고 달려든다. 열에 셋은 내 부른 배를 보고는 재수 없어 하며 나가 버린다. 열에 넷은 화를 내며 내 발이나 종아리에 발길질을 한다. 열에 하나는 나를 불쌍해한다. “가와이소다(불쌍하네).” (263)


여자애들을 사서 만주로 데려온 스즈랑의 샤초(사장) 오토상은 요코 네가 아기를 임신했어도 계속 군인들을 데리고 자게 해.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권이란 단어는 이미 오래 전에 살해당한 시대였을 거잖아. 조선인 여자애들은 ‘천황이 군인들한테 내린 하사품’(71)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군인들한테 봉사해야 한다’(54)고 채근해. 신산(辛酸)한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바보같은 나는, 하사품들은 좀 더 깨끗하게 보존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사품들이 아래를 내놓고 강에서 빨래를 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사품으로 하여금 하루 열다섯 명의 군인들과 섹스를 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위문 출장을 가서 하루 백 명의 군인들과 섹스를 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게 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독자인 날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래서 한 챕터 정도 읽으면 휴식을 가질 시간이 필요했지. 휴우.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정도 오니 이런 문장들이 나타났어. 야!! 눈물을 닦고 얼른 소설을 읽어!! 독자인 나에게 힘을 모아 소리 치는 사자후 같은 문장들이었어.


나도 죽을 수 있을까? 그럼 만주에 내가 있었다는 걸 누가 알까? 누가 기억할까? 나오미가? 아유미가? 그 애들도 죽어버리면? 스즈랑의 여자애들이 전부 죽어 버리면 누가 알까?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간단후쿠를 기억하는 것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군인 콧물 묻은 삿쿠와 군표를 기억하는 것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가시철조망 울타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밤마다 군인들과 부르던 돌림노래를 기억하는 것이다.

요코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강 너머에서 삐를, 조센삐를 외쳐 대던 사내아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271)


누군가의 꼬드김으로 팔려간 조선인 여자애들. 예를 들어 일본인 장사꾼 아내가 식모였던 에이코를 만주로 보냈듯이(56), 실 공장으로 돈 벌러 가라고 엄마가 요코 등을 떠밀었듯이(63), 사쿠라코 언니보다 스무살 더 먹은 남편이 국숫집에서 늙은 사내에게 언닐 팔았듯이(88), 그녀들은 모두 조선인의 이름을 빼앗겨. 그리고 더 이상 산 자의 이름이 아닌 죽은 자의 이름(스즈랑에서 죽어간 조선인 여자애들의 이름)을 물려받아. 그런 너희들의 이름을, 아니, 너희들을 그냥 잊어야 할까? 아니야. 우린 잊어서는 안돼.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땅 만주에서 하루에 열다섯 명 군인들의 몸을 받았던 너희들 열명을, 거기에 죽은 여자애들까지 합친 더 많은 조선인 여자애들을,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이, 너희들을 기억해야 해. 요코가 말했듯이, 목을 매고 죽은 미치코 언니를 기억함에 대해 말했듯이.


나는 요코가 아니다.

미치코 언니는 미치코가 아니다.

미치코 언니가 미치코가 아니면 누굴까. …중략…

미치코 언니가 스즈랑에 있었다는 걸 누가 알까. 누가 기억할까. 나라도 기억해야 하나. 기억해서 뭐 하나.

미치코 언니는 미치코 언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270)


만주의 스즈랑에서 ‘조센삐’들이 죽어도 그 자리는 새로운 여자애들로 채워져. 죽은 애들은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지만 그들이 잠시 빌려 썼던 이름들은 트럭을 타고 온 ‘새로운 조선인 여자애들’이 물려받게 돼.


에이코 언니가 여자애들을 보고 말한다. “아타라시(새것이네)!”

오토상은 아타라시 하나에게는 나나코라는 이름을, 또 다른 아타라시에게는 미치코라는 이름을 준다. 오토상의 입은 물레방아, 다람쥐 통, 팽이다. 녹슬까 봐 수시로 돼지기름 칠을 하는 그 입에서는 일본 여자애 이름이 돌고 돈다.

아타라시 하나는 나나코의 방으로, 또 하나는 미치코 언니의 방으로 던져진다. 스즈랑에는 이제 빈방이 없다. (280~281)


물론, 조국을 위해 싸워 주셨던 독립군들의 존재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2025년 5월 16일 현재, 단지 여섯 명만이 남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재도 잊지 말아야 해. 아직까지도 단 한 마디 일본의 사과도 없는 땅에서 묵묵히 살아가시는 할머니들을 잊지 말아야 해. 어딘가의 요코, 어딘가의 나나코, 또 어딘가의 고토코, 레이코, 하나코, 아유미, 사쿠라코, 요시에들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해.



From 해방된 나라에서, 현


덧)

나무위키 (일본군 위안부)

https://namu.wiki/w/%EC%9D%BC%EB%B3%B8%EA%B5%B0%20%EC%9C%84%EC%95%88%EB%B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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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노래의 한 소절과 한 소절 사이에는 널빤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허리춤을 풀고 군복 바지를 엉덩이 밑까지 끌어 내리는 소리가, 군인의 몸에 삿쿠를 씌우는 소리가 끼어든다. 군인들이 "메오 아케로(눈 떠)!" "아시오 히로게로(다리를 벌려)"! 하고 다그치는 소리도.
돌림노래 한 소절은 삿쿠 하나다.
돌림노래 한 소절은 군표 한 장이다. (45~46 / 돌림노래)

나는 강물에 손가락을 댄다. 혹시나 써지지 않던 글자가 써질까 싶어서. 써지지 않던 편지가.
편지가 써지면 뭐라고 쓸까.
‘엄마, 나 만주 실 공장에서 아기를 낳을 거 같아요. 누구 아기인지는 묻지 마세요. 실 공장에서번돈은 집에 갈 때 가 (288) 지고 갈게요. 답장은 마세요.’
너무 길다.
꼭 쓰고 싶은 말만 써야 한다면.
‘답장은 마세요.’(287 /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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