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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벌레의 서재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 10,800원 (10%600)
  • 2015-07-15
  • : 11,764

저녁을 먹고 나서 거실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얼핏 엄마 뭐하냐고 묻는 소리, 남편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져 있던 마른 빨래 두어개를 접고 다시 누운 기억은 있지만 지금이 밤 두시라니 어이없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늦잠을 잘거고 하루가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날도 더운데 말이지.

그래도 뭐 괜찮을거다. 사는 게 뭐라고!


 

 

여기 암에 걸린 할머니가 있다.

의사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니 2년, 돈은 얼마나 드느냐 물으니 천만 엔이란다. 항암제는 주지 말고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달라는 주문을 의사에게 한 후 스스로 럭키하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다. 왜냐하면 프리랜서 작가라 연금이 없어서 아흔살까지 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그동안 악착같이 저금을 했는데 살 날이 이년밖에 안 남았으니 더 이상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아낄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대리점에 들어가서 잉글리시 그린의 재규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거 주세요."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 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물건을 쓰고 싶어서 갖고 싶었던 접시를 주문한 후 예쁘고 세련된 잠옷을 잔뜩 사고, 보고 싶은 DVD도 착착 사들인다.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해서 읽고 난 후에 죽기 전에 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던 그녀, 사노 요코는 2010년에 죽었다.


 

어느날 갑자기 살 날이 2년 남았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잠시 생각해봤다.

저금은 하나도 없으니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재규어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몇 권 정도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책을 읽는 대신 시간이 없음을 탓하면서 옷장을 정리하고 안 신는 신발들을 내다 버리고 주방 선반을 닦아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내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인가. 겨우 그것 뿐일까. 이루지 못한 꿈이나 해 보지 못한 근사한 일들을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게 부질없다는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내일은 책상 정리라도 하고 어떻게 하면 나만의 저금을 할 수 있을지 궁리를 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정말 죽는 것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나도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갖고 싶은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결국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책을 읽고 나서 죽는다는 것도 결코 무서운 것만은 아니며, 지금의 날들을 더욱 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할머니다. 무섭군요. 요코상!

 


죽음을 앞두고 혼자 사는 할머니의 책이지만 어둡고 우울하지 않다.

읽다 보면 살고 죽는게 참 화사한 일이구나 싶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한 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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