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독자로서 김선주의 글을 좋아했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 참여연대 '어른의 탄생' 강좌에 잠입 수강했다. 이 글은 6회에 걸친 선생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독후감을 접목한 형식으로 쓰여졌다. 괄호안의 숫자는 본문 인용 페이지다.
SJ워너비
유독 춥던 지난 겨울날, 아침 댓바람부터 선배네 갔습니다. 선배가 커피물을 올리는 동안 저는 식탁에서 <한겨레>신문을 뒤적거렸지요. 김선주선생님 칼럼이 있었어요. 한달음에 읽고는 중얼거렸습니다. “김선주선생님은 최고의 글쟁이야. 술술 읽히고 핵심이 명료하잖아. 절밥 같이 담백한 외유내강 글쓰기. 아, 정말 닮고 싶어” 20년 논술교사로 높은 주가를 올리는 선배는 제 말에 열렬히 동조했습니다. 암튼 말에는 실행의 의미가 있나봅니다. 평소에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터놓고 나자 김선주선생님은 그날로 제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김선주선생님의 책이나 그 흔한 인터뷰 자료 하나 없었습니다.
김선주선생님의 <어른의 탄생> 강좌가 있다는 정보가 들려왔습니다. 심히 갈등했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은 1년째 정신분석학 세미나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황금같은 취재나 약속도 마다하고 사수해왔는데 그 원칙을 잠시 접어야했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올해로 마흔. 글 쓰는 것과 사는 일이 온통 혼란스러운 생의 과도기에, 마치 김선주선생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또 사람얘기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인터뷰 본능이 발동했습니다. ‘여섯 번 만남의 기회는 흔치 않다. 김선주라는 산으로 가자.’ 그리고 거짓말처럼 강좌 말미에 수강생들끼리 인터뷰 이벤트가 진행됐고 저는 우월한 제비뽑기 실력으로 김선주선생님과 짝꿍이 되었습니다. 하하하.
나는 이야기마니아
수업시간 좌석배치가 정사각형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선생님과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수강생들이 질문을 하면 갑자기 선생님의 상체가 그쪽으로 바짝 당겨지고 안경 너머 눈초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워집니다. 그리곤 말 따라 펜이 춤춥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어느 기업의 카피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턱 받치고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꼬마아이가 훌쩍 큰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눈빛 반짝이며 사는 얘기에 몸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한평생 몸에 저장된 ‘사람의 말’이 숙성되어 촌철살인 같은 지혜의 말씀으로 나오곤 했죠.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간다는 이순(耳順)의 포스, 제대로 작렬이었습니다. 아하, 김선주.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나한테 비밀을 많이 얘기했고. 크면서도 외숙모, 엄마 친구들, 큰 언니 얘기 듣고 선행학습이 됐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 한번은 엄마 친구들이 모여서 여자가 50에 과부가 되면 오복 중에 하나라고 하는 거야. 그걸 어릴 땐 무슨 말인지 몰랐지.(웃음) 어른들 얘기 들으면서 요길은 위험한 길이구나 알아차리고. 자라온 환경이 어른들 삶을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던 것 같아. 선천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감정이입이 잘 되지. 역지사지로 생각하니까.”
나를 키운 것은 그러나 사람들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나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은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333)는 선생님의 고백은 자서전용 레토릭이 아닙니다. 한겨레에서 선생님이 후배들의 365일 상담센터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남자후배의 부인까지 찾아와 이혼을 상담할 정도로 선생님은 “후배들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셨습니다.
아마도 조기교육 덕분인가 봅니다. 선생님은 서울 한복판에서 나고 자라 아버지쪽으론 강원도에서, 어머니쪽으론 북에서 무조건 밀고 쳐들어온 친척들 때문에 마당에 군용텐트까지 쳐놓을 정도로 집이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또 어머니는 집에 온 숱한 친척들 밥을 지어 먹였는데 어머니가 쌀과 밀가루와 멸치, 김치, 된장 몇 가지의 푸성귀만 있으면 요술처럼 잔칫상도 차려내던(354) 손맛의 여왕이십니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딸의 책상에 놓인 재떨이를 모른 척 깨끗이 비우고 매일 방 청소를 해주셨죠. 우릴 딸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량 중에 한량이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매일 아침 아무런 잔소리도 없이 밥상에 술국을 내놓으셨다(372)고 합니다. 김선주선생님의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부모님의 뒷등을 보고 배웠다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부럽기 짝이 없는 상속녀입니다.
눈물의 방, 연민의 강
“10살 때 운동장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세상 사람들이 다 죽는다는 생각에 너무 슬퍼서 울었던 기억이 나네. 우주에 혼자 던져진 사람들이라니.......집에 달려가서 큰 언니한테 언니는 사람이 다 죽는 거 알았느냐고 물어봤지.... 50년이 지났지만 그 때보다 더 자란 거 같지가 않아. 크지는 않고 지금도 매일매일 고민하고 어떻게 사는 게 좋은가, 60이 되도록 고민하고 있네.”
언니 있는 친구들이 그렇듯이 넷째 딸인 선생님은 꽤나 조숙한 아이였지요. 생로병사를 겪는 인간이 가엾어 눈물을 쏟은 어린 숙녀는 부처와 예수의 대조적인 삶을 번갈아 비추며 사람이 산다는 것의 화두를 놓지 않고 사춘기를 보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연민으로 변해갔지요. 하지만 ‘이대 나온 여자’는 조선일보 기자가 됐고, 승승장구 젊은 날을 보냅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인생의 양지쪽은 당연히 내 차지라는 생각만 하고 그늘에 있는 사람의 생존문제는 그들의 일이라고 생각(45)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결혼, 해직, 한겨레. 라는 존재-사건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시나브로 ‘없는 자’와 ‘앓는 자’의 편이 되어갔습니다. 소싯적 해질 무렵 운동장에서 흘린 눈물은 몸 밖으로 넘쳐 연민의 강을 이뤘고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셨죠. 선생님 글에 면면히 흐르는 약자에 대한 감수성의 발원지가 궁금했는데 '눈물의 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내 삶이 대한민국 평균 수준이면 만족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았고...기자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대한민국 평균 수준의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라는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했다’(335)고 말합니다.
옥소리 살려낸 '올해의 칼럼'
제가 선생님에게 완전 반한 것은 ‘올해의 인물, 옥소리’라는 칼럼이었습니다. ‘아내의 성’에 대한 불만을 겉으로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어떤 여성운동가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했다고 쓰셨죠. 외국놈이랑 바람난 년이라며 여론의 뭇매를 받던 옥소리를 재해석했습니다. 죽은 사람 살려냈습니다. 그것은 결기와 내공의 절정이었습니다. 일간지에 이런 글이 버젓이 실리다니 너무 벅차고 좋아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릅니다.
상투어나 과격한 단어, 날선 페미니즘 용어 하나 없지만 내용은 매우 파격적이고 그러면서도 점잖은 목소리였습니다. 가만히 등을 쓰다듬듯 흐르는 글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이 완벽한 논리가 그물처럼 덮여있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면서도 적을 양산하지 않는 글쓰기. 평범한 일상어 속에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글쓰기. 남아도는 부속이 없는 잘 짜였으나 넓은 여운을 거느리는 글쓰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소재는 반드시 일상에서 찾고. 문어체와 구어체가 너무 다르면 안 돼. 말과 글을 접근시켜야 하지. 학문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다는 거고. 그리고 소리 내서 자꾸 읽어봐. 턱턱 걸리는 단어, 음성학적으로 걸리는 단어를 빼고. 장조에서 단조로 리듬을 바꿔 변화를 주고. 미문보다는... 글은 힘이 있어야 해. 이끌어나가는 힘. 글은 약간 거칠어도 메시지가 중요하지. 내 경우는 아름다운 문장은 읽을 때는 짜릿짜릿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더라고. 그것보다 글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 확 전해지는 글이 오래 남지.”
선생님은 한겨레에서 마감이 제일 늦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글을 가장 늦게 쓰는 사람. 글쓰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고개를 저으십니다. 그렇지요. 글이란 녀석이 얄궂어서 힘들게 쓰여 질수록 쉽게 읽힙니다. 궁수가 제대로 된 활을 쏘기 위해 천개가 넘는 화살이 발아래 쌓이듯이 선생님 발아래는 버려진 단어들이 수북했겠죠. 담배연기와 한숨이 자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저자후기에 밝힌 글쓰기의 비법, 아니 자기성찰에 이르는 그 혹독한 ‘고문의 기술’을 저도 수첩에 옮겨 적었답니다.
‘이글이 진실과 정의로움에 부합한 것인지,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역사에 올바로 동참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회피하거나 비겁하게 외면한 점은 없는가, 세월이 지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를 매번 곱씹었다’(378)
원조 신비주의, 바보 자유인
데이트하던 날, 선생님은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출간 막바지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자꾸 사진을 넣자고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고개 숙인 사진을 넣기로 했다며 좋아라하십니다. 이건 뭐, 서태지도 울고 갈 신비주의 아닙니까. 왜 그렇게 ‘용안’ 노출을 거부하시는지 물었더니,
“누가 뒤에서 이년! 하고 잡을 까봐 그래. 나는 목욕탕 가서 할머니랑 등도 밀어야 하고 통장이랑 선거에 누구 찍느냐고 얘기도 하고 김밥 집 아줌마랑 싸움도 해야 하는데 얼굴 알려지면 그걸 못하잖아. 싫어. 그동안 TV토론회, 인터뷰 한 번도 안 나갔어.”
저는 ‘이년!’ 에서 쓰러졌습니다. 상큼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김선주선생님 팬이셨죠. 선생님의 집 앞에는 늘 높은 분들이 다녀갔지만 헛걸음을 쳤습니다. 청와대 출신도 안 만나주기로 유명하신 선생님이 이웃에게 뒷덜미 잡힐까봐 몸을 사립니다. 레드카펫 깔린 비단길 마다하고 아버지 얼굴 같은 골목길(이창동) 누빌 자유를 사수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십니다. 아이 같은 파란동심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나저나 이게 말이 됩니까. 한겨레 후배들도 책 한 두 권 안 낸 기자가 거의 없는데 김선주선생님은 이번이 첫 책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꼽는데, 하나는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미 원고료 받은 글을 묶어 책을 내는 건 같은 물건 두 번 파는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흘러간 유행가를 틀어야할 때라는 후배들 설득에 못 이겨 이제야, 예순을 넘겨서 저자로 데뷔하십니다. 또 남들은 어떻게든 명함에 한 줄 더 넣으려고 안달인데 선생님은 아름다운재단 대표 등 여러 가지 탐스런 공직, 온갖 위원직 위촉을 마다하고 ‘언론인’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바보 김선주입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처신 혹은 소신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평생 옷 한 벌로 산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자 최고의 권력자인 알렉산더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얼마든지 원하면 재산과 권력도 줄 수 있는 알렉산더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지금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시오”
은근한 파격, 약간의 사치
돈이고 명예고 소유할수록 소유당하는 것은 진리. 선생님은 모든 예속을 거부한 일급 자유인이십니다. 이를 두고 선생님은 ‘약간의 사치’라고 표현하십니다. 선생님이 살면서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데, 일상의 자유와 더불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스타일입니다. 저는 매주 화요일. 선생님이 오늘은 어떤 패션으로 나타나실까. 회를 거듭할수록 ‘은근한 파격’을 기대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팔둑에 구멍 뚫린 상의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소심해서 입어보지 못한 옷인데 선생님이 입으셨고 너무 잘 어울리셨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면.. 왜 질식할 것 같잖아. 어디 한 군데는 싸구려로 하고 머리라도 좀 헝클어져야 생명력이 느껴지지. 너무 애쓴 게 보이면 안 되고 멋 안 낸 거 같은데 멋스러워야 좋지. 이 가방? 싸구려야. 육천 원 주고 샀어. 옷에 돈 쓰면 바보야.”
꽃무늬와 반짝이, 효도신발을 넘어선 60대 스타일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신 선생님을 뵙는 것이 <어른의 탄생> 가는 큰 즐거움의 하나였습니다. 사실, 기품 있는 보헤미안 룩은 가수 이상은의 노년에나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김선주 선생님을 통해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끼얏!
훔치고 싶은 인생
멋, 염치, 체면, 예의, 사람. 선생님을 이루는 5대 원소 같은 말들입니다. 선생님은 부모자식이든 직장 동료이든 모든 관계에서 염치와 체면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자식을 핏줄주의에서 벗어나 생로병사를 혼자 겪는 그냥 한 사람으로 바라보라고 충고합니다. “나는 매일 밤 흔들렸다”고 아직도 모든 것이 불안하고 세상을 모르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에게 ‘사는 법’을 묻는 후배들이 줄을 섰습니다. 선생님의 60회 생일에는 후배들이 '선주스쿨'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선사했습니다. 김선주라는 학교를 다닌 후배들의 깜짝 선물이었죠.
한겨레에서 어떻게 인연의 농사를 지으신 걸까요. 선생님은 마흔 다섯에 논설위원이 되셨고 논설주간까지 올랐습니다. 남자들의 자리로 인식되었던 출판본부장을 무려 3년이나 하셨습니다. 아직까지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내 자리가 사무실 안쪽 제일 큰 책상이었고 씨네 21, 한겨레 21, 단행본팀...각 팀별로 자리가 나뉘었는데. 나는 팀장한테 할말 있으면 직원들 책상에 가서 앉아서 마주보고 얘기했어. 자리로 불러서 옆에 세워놓고 곁눈질로 보면서 어떻게 얘기해. 서로 불편하잖아."
눈높이 친구 같은 상사였습니다. 권위를 버리는 방식으로 권위를 지키며 100명 조직을 보듬었습니다. 남자들이 말하는 리더십이나 조직 장악력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더라고(242) 당당히 말합니다. 퇴임 후에도 선생님의 인기는 식을 줄 모릅니다. 지금도 주위에 사람이 들끓습니다. 재잘거림이 그치질 않습니다.
저 또한 선생님과의 금싸라기 같은 데이트 시간을, 한심하게 제 푸념 늘어놓느라 다 탕진해버렸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머리 쥐어박으며 후회했습니다. 이게 다 잘 들어주시는 선생님 때문입니다. 근데 더 문제는 선생님은 듣기만이 아니라 퍼주기 대장입니다. 6회 수업에서 3회나 수강생들에게 귀한 책 선물을 챙겨주셨죠. “나 같은 사람 얘기를 돈 내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고 염치없다”는 말과 함께요. 특히 마지막 날은 따끈한 신간에 친필 사인까지 해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김선주선생님의 그늘에서 지난 6주간 등 따시고 배부르고 많이 웃고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럽다면(348)...제게는 김선주 선생님이 그렇습니다. 자기성찰에 바탕한 글쓰기 태도와 약간의 사치를 누리는 삶의 방식이 그러합니다. ‘비겁하게 살지언정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는 선생님의 좌우명을 일일삼창 하면서 이번생도 다음생도 진정한 로맨티스트로 살(376)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