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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감성

<중세의 철학적 사유>를 보면서 엘로이즈 논의를 다시 세우고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세 철학의 절정이 아니었다는 상대화는 새로운 관점을 시사한다. 14세기는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규준을 세운 시대였다. 스코투스, 쿠자누스, 쥐리당 등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세가 암흑의 시대일 필요도 없고 신학과 봉건의 세기일 필요도 없다. 쉬엄쉬엄 읽어가자. 아쉬운 점은 제목은 중세철학인데 아시아, 아프리카는 없고 유럽중심적 관점만 녹아있다. 아주 잘 알려진 것처럼 이븐 루시드라는 이슬람 학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유럽의 중세철학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를 불러올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아비세나(이븐 시나)도 손에 꼽히는 중세철학자다. 그는 존재를 세 가지 범주로 생각했는데, 필연적 존재, 가능적 존재, 불가능한 존재라고 정리했다.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과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 그리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범주화가 무얼 말하고 있을까. 존재는 잠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매몰찬 말이기도 하다. 아비세나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본질이 있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것은 신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다른 가능적 존재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가능적 존재로서 필연적 존재에 기대게 된다. 단순하게 들리지만 많은 것을 함축한다. 원인은 존재하게 만드는 힘이고, 본질을 변화시키기 않는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도 설명된다. 죄를 처벌하고 존재를 처벌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변형해 말할 수도 있는 근거가 된다. 의지와 행위는 존재론적 물음이 아니므로 존재를 제거할 수는 없고, 처벌은 윤리적이게 된다.  


쿠자누스는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신비적 직관으로 접근하기에 '<배운 무지>'라는 말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신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동시에 포괄한다고 주장한다. 신 안에서 하나로 화해한다. 쿠자누스가 대립의 일치라는 개념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이 시대에도 어쩌면 모든 대립이 하나로 화해되길 바라는 신학들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중세철학은 존재란 무엇이냐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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