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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랑시에르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익히 알려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공동체 안에서 몫과 자리가 어떻게 경계설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랑시에르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을 설명하면서 엘리트가 각인시키는 지식의 문제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무력화시키고서 자신의 상황을 뒤바꿔야 한다는 혁명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랑시에르 이론은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건너야 할 화두를 품고 있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평등을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는 증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평등해질 수 있으려면 소수자의 지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럼으로써 공통공간 속에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평등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들 열망에서 시작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고, 감각을 열고 시민으로 나가는 급진적 정치가 가능할 구성의 조건 아래 발생한다. 

랑시에르가 인간을 시민으로 세우는 과정이야말로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정치적 포함과 배제의 관계를 문제시하고 기존 비판이론이 갖고 있는 함정들을 찾아낸다. 랑시에르의 다음 언급을 보자면 그 대강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비판은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다. 비판은 숨겨질 것이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긴다. 비판은 진정한 비판의 자질을 가진 특별한 주체를 배경함으로써 부정의 주체의 이름인 '아무나 anybody를 부인한다. 비판은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역사적 객관성을 맹신함으로써 부정의 근본적인 우연성, 부정의 시간인 아무 때나 anytime를 질식시킨다."

'아무나, 아무 때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잘 짜여진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랑시에르에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 쟁취해서 구축한 지위를 어떻게 공백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정치는 신체감각을 나눔으로 개인에게 특수한 지위를 배분하고 있는 체계다. 예술이 감각을 다루므로 픽션의 세계는 정치를 보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의 핵심일 수도 있다. .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1990년에 나온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이후 픽션의 가장자리를 언급하는 랑시에르의 의도는 무엇일까. 픽션이 뭔가. 눈을 들어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이 픽션이고, 픽션의 효과다. 픽션으로 합리화한 것들은 무엇이었고, 픽션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에서 픽션으로 바뀌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으나, '가장자리'가 문제다. 픽션이 되거나 되지 못하는 경계가 있나,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합리성은 픽션에서도 유효한가. 

목차를 보니 과학의 문턱이 보인다. 문도 아니고 문턱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상상적인 자리는 어떻게 있는가. 픽션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일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랑시에르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옮겨 나르고 있는데, 이럴 때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은 어떨까/ 

여러 생각들이 떠돌지만 분명한 문제 지점은 하나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자리를 이미 차지한 자들이 누구냐는 점이다. 

우선 <픽션의 가장자리> 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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