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트가 정치신학의 서문에서 '중성' 권력을 말할 때 갈등 상황에 놓인 독자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치신학에 대한 새로운 적용 사례가 다수 생겨났다. 15~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
바로크철학의
神에 유비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17세기
군주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9세기
'중성'
권력,
그리고
'집행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순수 조치-행정국가의
표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신학적 사유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수많은 사례들이다.
중성
권력은 17세기 종교
내전을 종식시킴으로써 확립된 주권국가를 말하며,
여기서 '중성'이란
주권국가가 신 • 구교를 포함한 영토
내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우위를 지키는 일을
뜻한다.-옮긴이
조치-행정국가는
행정 분쟁을 행정재판소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행정권이
사법권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행정부의 독자적 권한이
큰 국가를 뜻한다.-옮긴이"
세속화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 최근 몇 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슈미트는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 신학적 - 인간적 - 경제적인 문제에 연결된 세속화는 본래성을 상실한 채 떠돈다. 슈미트에게 중요한 점은 다만, 어떠한 비정치적 결정도 언제나 하나의 정치적 결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신학도 비정치적 신학은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정치신학인가. 정치학은 정치신학인가.
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화 작업은 나치즘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알려졌다. 나는 슈미트를 읽을 때마다 늘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언제였더라. 어떤 분께서 진지하게 충고 하셨다. 그냥 슈미트 그대로 읽으라고. 그런 염려는 오독의 끝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더구나 학인이 가져야 할 기본 태도도 결여된 거라고 하셨다. 그 날카로운 지적 뒤에는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알았다고만 했다. 순간 그는 '계급성'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저 인용 글에 나오는 중성 권력은 계급의 기원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번 가을) 슈미트, 미키 기요시, 제임스 스콧, 벤야민, 하이데거를 건너가며 헤겔과 함께 정치신학을 읽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