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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1.

두 번은 읽은 책 <중동태의 세계>를 번역하신 박성관 선생님이 지난 봄 먼 길을 떠나셨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흥미로운 사유를 세상 두루두루, 여러 존재들과 나누고 싶으셨던 분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박성관 선생은 이번 개정판 마지막에 별도의 장 [5년 뒤 저자가 보내는 편지]을 추가하여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질문 자체를 바꾸자고 한다.

“이 세상 삶에서 어떠어떠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뭘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 때 나는 기쁘고 행복한가? 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윤리적 물음이라는 것이다.

저자를 개정판으로 이끈 두 번째 이유는 다윈의 핵심 사상에 곧장 직결된다. 박성관 선생은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물의 자유를 선언하다> 책소개 중에서)















2.

“당신과 만날 수 있는 건 내가 검사기 때문이죠. 평생 마주칠 일 없습니다.” 어떤 드라마 대사인데, 내용이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투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렇게 속물적일 수가 없다.

요즘 입시교육에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도 이 말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초등학생이 국어로 해리포터를 읽고, 중학생이 선수학습으로 몇 년을 먼저 뛰어다니는 덕분에 소규모의 학군지는 그들 방식의 폐쇄적 리그가 형성되어 있다는 게 거칠고 불투명한 교육적 현실이다. 그렇다. '대치동 아이들'은 의대나 법대를 목표로 구축된 생활세계에서 몇십 년을 지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세계에서 성공한 의사-판검사 앞에는 말 그대로 생면부지인 인류가 앉아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대사가 현실이라면 이 현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벤야민은 꿈을 집합적이고 역사적인 체엄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들어낸 소망 시스템이 꿈의 리얼리티를 추동한다. 꿈은 벤야민 논의에서 흥미로운 지점이고, 어쩌면 현대교육은 <벤야민 꿈>의 무게를 삭제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세대들의 삶에서도 관철되고 있는 하나의 단계적 과정으로서의 각성, 잠이 이러한 과정의 최초의 단계이다. 어떤 세대의 유년기의 경험은 꿈의 경험과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의 역사적 형태가 꿈의 형상이다.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 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 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 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 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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