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언급했던 <신봉건주의>는 시대를 버티고 있는 여러 갈래의 체제들을 사유하기 좋은 개념이다. 영미철학이 자주 갈구하는 고대그리스 철학의 우선성은 신봉건을 덮고 있는 난제들의 해결책 중 하나다. 따라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유 흔적들 또한 노예제를 암막 속에 가린 방식으로 존재한다. 최소한 내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과거 사유를 훓어보는 일이 필요할 때 <신봉건주의>라는 규준점은 좋은 지랫대가 된다. 쿠자누스를 읽고 있는 와중에 왜 이런 구구절절한 생각들이 떠오르겠는가. 우리는 절대적 앎을 추구하려는 강박을 요구받고 있다.
the existent object’s quiddity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감성 Sinnlichkeit, 지성Verstand, 이성 Vernunft을 구분하며 중세인이 가졌던 곤란과 이상을 드러냈다. 그는 유적 일치와 종적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앎을 구한다. 철학적 신학은 신을 정의해야 했다. 요즘 읽는 벤야민 책에서도 '차이'를 대수롭게 다루는, 종내 대수롭지 않게 만들고야 마는 장면을 본다.
다음 쪽에 판타스마고리에-이렇게 읽는 게 맞나?-에 덧붙여 노동자 운동의 타락을 이야기한다. 유적 일치와 종적 차이 그리고 지성과 이성, 감성은 얽히고야 만다. 차이를 위해서 일치를 위해서.
이 책의 저자는 젊은 아도르노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오늘날 그것도 한국에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까. 이 책도 벌써 7년차이니 젊은 연구자보다 중견 연구자라고 해야하나.
P. 36~37현대사회에 적용해 보자면, 이런 계몽의 동일성 논리를 가지고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이야기는 혐오 논리예요. 다양한 파국적인 상황에 접한 인간이 공포에 직면했을 때 그 공포를 반드시 특정 대상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게 혐오의 메커니즘입니다. 제노포비아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혐오의 메커니즘 역시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1940년대에 썼지만, 21세기에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혜안 중 하나가 혐오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공포라는 정념과 지배의 상관관계에 관한 저자들의 서술은 오늘날의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소개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