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회의주의에 대해서
푸코의
주체를 향한 회의주의는 익히 알려진 예속화assujetissement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권력이
만들어낸 주체의 형상을 주체라고 할 수 있겠냐는
지점에서 지적 담론을 유발하게 되었지요.
권력테크놀로지는
개인이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기 구축을 행하는데,
만약
시장원리를 따르거나 통치기제를 그대로 복사하려
한다면 예속적인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 규율에 따라 통치방식에 저항하고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구축하는 테크놀로지의 활용이라면 주체의
권력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존재자는 개별화하면서 전체화되지
않기 때문에 이중적 억압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개인이
해방되려면 우선은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를 회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푸코의
회의주의에 정당한 명분이 주어진다면 국가에 결부된,
자본의
작동원리에 종속된,
전체화된
방식에 대한, 돌이킴에서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참 묘하지요.
이것은
누구의 명분일까요.
회의주의자의
관점이란 무엇일까요.
철저하게
부르주아적 지점입니다. 자기통제의
양식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시길
푸코주의에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