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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章, ‘규약, 분석성, 전체론’, ‘“규약에-의한-진리”: Quine의 반론’ 節)

 

3. “규약에-의한-진리”: Quine의 반론

 

규약이 진리를 만든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Quine의 첫 번째 요지는, 정의(이는 규약에-의한-진리에 가장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사례일 것이다)가 진리를 창조create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정의가 하는 일이란 명시적으로 논리적 참인 형태의 진리를 그렇지 않은 형태로 변환하는transform 것이다(WP[『역설의 방식들The Ways of Paradox』] 87-8쪽[「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 논리적 참에 대한 앞선 정의에 따르면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는 논리적 참이 아니다. (“암말”을 “쥐”로 대체하면 거짓인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생각을 더 자연스럽게 말해보자면,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는 “모든 암컷 말은 암컷이다”와 정의상by definition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은 동일한 참 즉 동일하게 참인 명제를 표현한다. 뭔가 혼동하지 않는 이상은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가 그 자체로 정의상 논리적 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Quine이 지적하는 점은 이게 아니다. 그의 타겟은 어떤 진술들의 참(특히 모든 논리적 참)이 전적으로 규약의 문제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가 참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규약에 호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암컷 말은 암컷이다”가 논리적 참이라는 사실에도 호소해야 하기 때문에, 논리적 참 자체가 규약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이상 전자의 참됨이 전적으로 규약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의가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기껏해야 규약으로서의 참에 대한 조건적인 설명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논리적 참에 대한 설명이 주어질 경우에라야, 몇몇 진리들의 참됨은 논리적 참에 대해 주어진 그 설명과 더불어서만 규약에 의해 비로소 설명된다. 하지만 정의는 논리적 진리 자체를 설명해낼 수 없다. 정의는 非-논리적 참을 논리적 참으로 변환해줄 것이며, 논리적 표현들이 다른 논리적 표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경우라면, 일부 논리적 참 역시 정의에 의해 다른 논리적 참으로 변환된다. 하지만 모든 논리적 표현이 정의될 수는 없기 때문에(가장 마지막에 남는 논리적 표현을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는 논리적 진리의 참됨이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Carnap이 실질적으로 제안하는 전략은, 한 언어의 일부 문장들을 “이것들을 참이라고 결정하자!” 하는 식으로 그저 참이라 명시한 뒤, 그 문장들로부터 여타 문장들을 도출하는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논리적 참을 포함하여 그러한 모든 문장들은 약정에 의해 참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Quine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두 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우선 첫 번째 반론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종류의 것이다. 이론가들이 어떤 이론에 대해 특정 일부 문장들을 결정에-의한-진리truth-by-decree로 명시할 권한을 갖고 있다면,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 무엇이 되었든 여타 분야의 이론가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왜 없겠는가?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이 앞으로는 규약에 의해 참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물리학자들이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분명 그런 과학자들은 그런 규약들을 때때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그리 결정적인 사안은 아니다. 분명 과학에서 사용되는 이론은 변화하는 이론적 압력에 맞춰 시간에 따라 변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제안을 여전히 수상쩍게 여길 것이다.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 전체를 뒤엎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막중한 작업인 것이다.

Carnap은 수상쩍게 여겨진다는 점이 논증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응수할 것이다. 분명 일부 이론가들은 물리학 법칙들 내에 규약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주제는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대한 節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이제 좀 더 실질적이면서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Quine의 두 번째 반론(WP 103-5쪽)을 살펴보자. Carnap이 이해한 대로의 규약은 진술되어야stated 한다. 이를 명료하게 보이기 위해 Quine은 다음 예를 제시한다:

 

(1) 모든 x, y, z에 대해, ‘p이면 q이다’에서 ‘p’와 ‘q’를 각각 x와 y로 대체한 결과가 z이고, x와 z가 참이면, y는 참이다.1)


1) WP 103쪽. 논의에 맞는 스타일로 약간 변형함.

 

이 진술이 말하는 바는, 참인 전건을 갖는 참인 조건진술이 있을 경우 그 조건문의 후건도 참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Mary가 키가 크면 John은 키가 크다’와 ‘Mary는 키가 크다’가 둘 다 참이라 가정하면, ‘John은 키가 크다’ 역시 참이다.) 이제 x, y, z가 (1)에서 말해진 대로 처리되었다고 가정하면 다음을 얻는다:

 

(2) ‘p이면 q이다’에서 ‘p’와 ‘q’를 각각 x와 y로 대체한 결과가 z이고, x와 z는 참이다.

 

이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 y는 참이다.

 

하지만 이는 ‘…이면 …이다’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즉 (1)과 (2)가 주어질 경우 우리가 (3)을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1)에서 괄호 밖에 나타나는 ‘…이면 …이다’를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해 자체는 (1)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1)은 그 단어에 대한 이해를 선제하고 있는바, 우리가 ‘…이면 …이다’를 이미 이해하고 있지 않은 이상 (1)의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 규약에 대한 진술은 논리적 참이나 논리적 관계를 결정할 수 없다. 논리적 참이나 논리적 관계를 규약 진술로부터 도출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부터가 바로 논리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Quine이 말하듯이:

 

한 마디로 말해 난점은, 논리가 규약으로부터 매개적으로mediately 진행되어야 한다면, 규약으로부터 논리를 추론하는 데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 이설이 스스로를-선제self-presupposition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난점은, [논리적] 원초용어들을 자체적으로-선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초래되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다. …이면-어구if-idiom, …가 아니다-어구, 모든-어구 등이 최초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된 뒤 … 그 어구들의 의미를 획정하는circumscribing 방식으로 … 우리가 규약을 채택한다고 상정된다. 문제는 그것들 자체〔그 규약들 자체〕에 대한 의사소통이, 우리가 그 의미를 획정코자 하는 바로 그 어구들을 무리 없이 사용하는 데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어구들에 이미 친숙해 있는 경우에만 성공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2)

(WP 104쪽.)

2) Hillary Putnam, Paul Benacerraf, 『수학철학』(1983, 2nd ed.), 박세희 譯, 아카넷, 2002, 539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있다:

 

한 마디 말로, 난점은, 만약에 논리가 규약들로부터 중간단계를 거쳐(mediately) 진행되어야 한다면, 논리는 규약들로부터 추론하는 논리가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와 같이 학설의 자기-전제(self-presupposition)로서 나타나는 난점은 근원어들의 자기-전제로 바꾸어서 나타낼 수 있겠다. if-어법, not-어법, every-어법 등은 시초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가정되었으며, 우리는 규약들을 그 어법들의 의미를 한정하는 방식으로 채택한다; 난점은 규약들 자신의 전달이, 우리가 제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바로 그 어법들의 자유로운 사용에 의존하고, 또 우리가 그 어법들에 이미 정통하고 있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사안이 있다. 학생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언어를 가르칠 경우라면, 그 언어의 논리적 표현들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그 언어의 논리표현들에 대한 이해를 선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논리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경우라면(혹은 무언가를 논리적 참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설명코자 한다면), 그러한 인식론적 설명은 그 설명에서 이미 사용되는 언어 그대로 표현된 논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Quine의 요지는 규약에만 의존할 경우 순환성 없이 이 일을 처리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Gary Kemp, Quine‘s Philosophy: An Introduction, Bloomsbury Academic, 2023, 19-21쪽.

 

 


cf. 콰인은 논리적 진리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대답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적 진리란 정의에 의한 진리요,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라고 본다. 이런 입장을 규약론(conventionalism)이라 한다. 논리적 진리의 체계란 하나의 형식체계(formal system), 즉 정의 없이 주어지는 기본술어(primitive terms)로부터 정의를 통해 다른 단어들을 얻어내고, 또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공리들(axioms)과 추리규칙들로부터 다른 진리들을 연역해 내는 체계로 정식화될 수 있다. 규약론자들은 여기서 정의와 공리들을 일종의 언어젹 규약(linguistic convention)으로 이해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中略)

 

콰인은 먼저 논리학이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경험 과학의 이론적 명제들도 마찬가지로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 주장한다. 논리학의 공리체계에 대해서만 ‘규약적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예를 들어 이론물리학의 공리계도 기본 술어와 공리에서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잘 공리화된 이론물리학도 마찬가지로 규약적 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결코 규약적 진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많은 진리들이 규약적 진리의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더 나아가 콰인은 규약에 의한 진리라는 개념이 논리적 진리의 성격을 드러내 주기보다는, 거꾸로 논리적 진리들을 전제로 하고서만 규약의 체계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 ‘총각=미혼의 성인 남자’라는 언어적 규약이 있다고 하자. 이 규약과 ‘모든 미혼자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부터 ‘모든 총각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어떻게 두 규약으로부터 이런 제3의 문장을 도출할 수 있는가? 그것은 대충 말해서 ‘A느 B이고 B는 C이면 A는 C이다’라는 논리적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공리와 정의가 규약들이라고 해도, 거기서 정리들이 연역되려면 다시 논리적 진리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논리란 규약보다 깊은 차원의 것이다(Logic goes deeper than any convention)”. 이렇게 해서 콰인은 개념적-분석적 진리들을 종합적 진리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구별하려는 생각뿐 아니라, 논리적 진리가 다른 경험적 진리와 달리 규약에 의해 참이 되는 진리라고 보는 견해들을 모두 근거 없는 것이라고 물리친다.

 


민찬홍, 「윌라드 반 콰인」: 『현대철학의 흐름』, 박정호 外 編, 동녘, 1996, 45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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