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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aysment님의 서재
ㅡ중대 막사에서 훈련장으로 가는 길엔 설구화가 피어있었다

작년 이맘 즈음 훈련기간 중의 어느 날엔 하루 하달된 전술훈련을 마치고 중대원들과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 꽃뭉치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봄날 넘어가는 서녘 황혼이 꽃뭉치 건너편 연못에 윤슬로 부시었다

ㅡ1학년 시절 동양철학의 첫걸음 과제로 동네 어느 가정집 담장 안에 피었던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도 모르는 꽃을 찍어 제출했었다

그 때 찍기가 이맘 때 즈음이었는지, 요사이 아침 등교길마다 보는 그 집 담장에 핀 꽃의 이름은, 아직도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모르겠다

그때도 알아내지 못했고 지금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그 꽃의 이름은 어느 가능세계에서든 필연적으로 그 이름으로 불릴텐데ㅡ

ㅡ그 해 벚꽃잎을 세던 일을 멈추어야 했으나 이제 와서 멈춘들 피차에 새로운 얼굴이란 피지 않을 터이니, 결국 내가 할 일은 모든 것을 다시 선언하는 일이다

그러면 여기 내가 호흡하는 세계에서 당신의 이름이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것도 아니면 다른 꽃인지 알아내려는 일을 이젠 포기해야겠다

당신의 호흡이 나의 허벅지에 펼쳐놓은 그 악보를 연주하는 일의 지난함을, 나는 깨닫는 게 아니라 선언하고자 한다

ㅡ나는 다른 이의 눈동자를 불러본 적이 없다

아직도 내 허벅지에 피어있는 음들의 이름을, 내가 부를 수 있었던 적도 없다

ㅡ내일 아침에도 나는 내가 보는 꽃이 설구화인지 불두화인지 모를 것이고, 이 셰계에서 올해 피었다 진 모든 벚꽃잎이 몇 장인지 여전히 모를 것이다

- ‘19. x.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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