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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하늘님의 서재
  • 미래 모델링
  • 비탈리 기베르트
  • 14,400원 (10%800)
  • 2014-06-11
  • : 2,135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이 책을 다 못 읽었다. 성실하게 읽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이 책의 내용이 신선하게 다가오기에는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이런 류의 자기계발과 영성이 혼합된 서적들의 독자로서 살아왔다. 젊은 남자가 쓴 책은 처음이었지만, 내가 읽어왔던 명상 영성 심리치유 자기계발 채널링메시지 등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여러 분야들의 유명한 서적들의 핵심 내용이 단순하고도 솔직한 저자 특유의 어조로 다시 설명되어지는 듯한 느낌이어서, 지루함을 자아냈다. 저자의 나이가 젊은 만큼 색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고 해도 결국 나에게는 모든 것이 복습이었던 것이다.

 

 책은 잘 꽂아두고 부록 씨디를 떼어내서 들어봤는데 이것은 정말로 놀라웠다. 나는 자기계발서 독자로 보낸 시간만큼 명상/수행서적의 애독자로서 보내왔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내내 명상 초보자 신세를 면치 못했으므로 책의 부록으로 주는 명상 씨디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씨디를 주는 명상책은 대개 무조건 사들였다. 그리고 들어보고 따라해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의 부록 씨디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씨디를 재생하자 헤드폰에서 음악이 울려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부터가 달랐다. 90년대 록과 메탈 음악을 즐겨듣는 나는 90년대가 지난지 너무나 오래되었고 그 시절이 계속해서 더 먼 과거가 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 이삼 년간 새로 듣는 음악이라곤 명상음악밖에 없었다. 내가 들어왔던 음악들은 명상음악하면 대충 이런 것이다 라는 선입견을 나의 뇌속에 생성시켜 주고 있었는데, 이 씨디에서 나오는 음악은 당최 내가 들었던 어떤 명상음악이나 명상책 부록 씨디에 깔리는 음악하고도 다른, 무겁고 엉뚱깽뚱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 무거운 남성의 목소리가 나오며 다짜고짜 어머니를 용서하라고 말하기에 나는 낄낄 웃어버렸다. 음악도 웃기고 감사하기만 한 존재인 어머니를 갑자기 용서하라고 다그치니까 그것 또한 웃음이 나왔다. 다크 사운드의 심각한 음악에 좀 심각한 듯한 나레이터 남성의 ㅅ발음이 th발음으로 터져나오고 어머니를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하는데 나는 껄껄 웃다가 나중엔 울었다. 그리고 또 웃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조건 감사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또한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감사해야만 한다는 신념 속에 감춰진 원망이 드러나고 진정한 용서도 일어났다. 결국에는 그들에 대한 감사가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이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과정이 있고 신에 대하여도 동일한 과정이 있다. 나는 오랜 세월 강렬하게 품어온 신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지구의 불행에 대한, 윤회계에 대한... 십여년을 구도자로 있으면서 신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스승인 레너드 제이콥슨이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 신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것에 공감했다. 그러나 용서조차 할 수 없는 마당에 사랑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의문을 품어왔다. 왜 세상을 창조했을까. 창조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이런 개지옥이 될 것을 알고도 했던 것 아닌가. 우주 법칙이라고? 끌어당김의 법칙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나처럼 마음이 약한 자들은 현실의 오랜 역경에 빠져 있을 때 감사함으로써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윤회계를 졸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온통 열악한 환경에 둘러싸여 보고 듣는 것이 전부 감사의 장애물로 작용하는데 육체를 가진 존재가 환경을 외면하고 감사에 몰두할 수 있는가? 한때 구원처럼 떠받들었던 유인력의 법칙은 가진 자를 더 가지게 해줄 뿐인 우주의 비정한 장난이라고 판단했다. 삼차원에 살지 않는 존재들에게 인간이란 삼차원의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고 이 모래가 존재하는 전부라고 말하는 얼간이들로밖에 안보일지 몰라도, 육체를 통한 감각기관만 있을 뿐 내면의 기관이 없는 인간이 육체적 현실을 감정만으로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 있을까? 그 우주법칙은 복음이 아니다. 고난에 빠진 자를 더욱 늪속으로 떠미는 유사다.

 

 한때 나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노트를 만들기도 했었다. 신문 속에는 세계 곳곳의 끔찍한 일들과 불행한 사건들이 있었고 텔리비전 속에도 같은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이야기들로 심각한 상처는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타인의 불행 이야기는 존재의 가장 바깥쪽에 난 흠집과 같아서, 계속 안쪽으로 깊이를 넓혀갔다. 나는 오래 전에 신문읽기와 스크랩 노트 만들기를 중단했지만 인터넷 뉴스는 매일같이 가장 참혹한 재난에 빠진 인간의 이야기를 찾아내 알려주었다. 뉴스가 말해주는 한국의 법정은 억울한 사람은 더 억울해지고 뻔뻔한 사람이 더욱 뻔뻔해지는 우주법칙(끌어당김의 법칙)의 존재 증명이었다. 착한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책도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용기를 수련하기 위해 지상에 올때 크나큰 불운과 역경을 일부러 선택한다고 말하는 책들도 많다. 그것을 읽을 때마다 이런 불행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느끼지만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가능한 것이 없다.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견뎌내어 책을 쓰거나 자신의 겪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쪽이건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나 자신의 현실적인 재난- 작은 질병들과 평범한 가난과 층간소음문제에 빠져 고군분투하고 있노라면 감사하고 있으면 감사한 일이 생긴다는 우주법칙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풀리지 못할 의문이 생겼다. 이미 복과 물질을 누리고 있는데 더 누리고 싶은 자들에게 그것은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들에게는?

 

 신이 직접 사랑을 깨우쳐주는'신과 나눈 이야기' 나 창조주들이 나와서 인간에 대해 강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우주로부터 오는 사랑의 메시지'와 같은 책들을 아무리 감명 깊게 읽고 몇번을 읽었어도 분노는 퇴색되지 않았다.  하지만 씨디속 음성이 신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라, 그리고 용서해라, 사랑한다고 말하고 끌어안아라 라고 시키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용서가 어이없이 일어났고 사랑도 그냥 생겨났다. 십년간의 증오를 십분만에 끝내버렸다. 명상씨디 하나가.

 씨디 속의 목소리는 인간은 누구나 신에 대한 이미지가 있으니 그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어안으라고 시켰지만 나는 떠올릴 형상이 없었다. 단 하나 꿈에서 본 것이 있어 그것을 적용시켰다. 언젠가 꿈 속에서 깊은 외로움 속에 신을 찾았었다. 자각몽이었다. 꿈이니 잠재의식과 더 잘 연결돼 있을 테고 신이 어쩌면 보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감은 눈 속의 암흑, 푸른 빛과 노란빛이 번갈아서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암흑 뿐이었다. 나는 그 푸른 색의 어둠을 껴안았다. 가슴의 크고 오래된 짐 하나가 가만히 줄어들었다. 현실은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용서 하나만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며칠 반복해본 소감으로는 부모에 대한 상처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일번 트랙의 앞부분을 매일 계속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용서와 사랑으로 끝난다 해도 사소한 원망을 매일같이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일번 명상을 매일 하고 싶다면 상처받은 부분을 떠올리는 것은 생략하고 감사한 부분을 기억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그저 마음속에서 부모의 눈을 바라보고 포옹하는 장면을 오래 지속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삼번 트랙에서 음악은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약간 어둡지만 무척 장엄한 음색에 변화가 있는 멜로디라인이 등장하는데 이 음악만으로 나는 큰 감동을 받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울컥해지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나레이터 남성의 강요는 (물론 강요는 아니다. 그러나 씨디를 듣고 있는 순간만큼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만하며 그자체로 훌륭하고 지금 자기 자신의 존재만으로 거대한 기쁨과 황홀경을 느끼라는 것이었다. 유달리 장중한 음성이 의식의 초점을 심장중심으로 인도하고 내면을 우주로 심상화시킨 뒤 그 우주의 어둠과 내면의 부정적인 부분을 전부 포용하게 만든다. 이러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큰 소리로 울어제껴서 옆방에서 혼자 자고 있던 개가 뛰어나와 내품으로 안겨들었다.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우니까 조용히 하라고 달래는 건지 개라는 존재는 원래 슬퍼서 우는 것과 감동의 울음을 구별을 못하는 건지... 이후로는 개가 안겨오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가며 울게 됐다.

 나는 죽어서 혼이 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삼번트랙은, 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느낌을 살짝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 이순간 이렇게 부족하고 미성숙한 나 자신의 존재만으로 기쁨과 경이로움을 - 기쁨과 경이로움만을 느끼는 상위자아의 눈빛과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육체적 자아에게 일별하게 해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에 관한 명상 부분이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나는 내가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인간인지 처음 알았다. 나의 돈 사랑은 지극하며 헌신적인 것이었다.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의 삼분의 일만큼도 돈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바뀌어 버렸다. 이 씨디의 돈 명상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며,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나에게는 부록 씨디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름다운 명상이었고, 하나의 심리적인 여행이었다. 용서와 이완, 자기사랑, 치유, 내적통로의 확장과 돈에너지와의 합일 등 한 사람의 인간 존재를 한장의 씨디가 다방면으로 어루만져 주었고, 나는 이것이 많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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