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인으로 우뚝 설 용기
김예림 2022/12/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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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아이 기억
- 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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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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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을 되돌아보며,
올 해 가장 행복한 순간 TOP 3를 꼽으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있게 그 중 하나로 '아니 에르노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라고 답했다.
전공 작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사회적 자서전(auto-socio-biographie) 등 여러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게 에르노가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용기'에서 온다. 사람들이 내게 에르노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뭐라고 말할지는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제 답을 찾은 듯 하다. (이때의 답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진 사람들에게 내놓을 만한 유리구슬 하나를 찾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가 에르노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 나와도 결이 안 맞는 부분은 있다고!)
그 기쁨을 안고 읽게 된 『여자아이 기억』은 에르노가 70이 넘어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써낸 글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 않은가? 1958년 여름, 자신이 18살에 여름방학 캠프 지도교사로 일했던 때의 기억을 소재로 쓴 글이다. 남성과의 성적 경험이 없던 여자아이가 함께 지내던 다른 지도교사들에게 성적 대상이 되어 희롱당하지만, 모욕적으로 느끼기는커녕 자신이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순진하게도 뿌듯해한다. 그 여름 이후 여자아이는 완전히 달라졌으나, 마치 어떤 주술에 의해 50여 년간 가둬져 있었던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간 언제나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글쓰기로 하여금 세상에 밝혀왔으나 『여자아이 기억』은 그중에서도 언제나 비어있던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작가의 작품 세계를 채우는 마지막 퍼즐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 나 또한 그간 이 시기의 이야기에 무언가 결손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매우 반가웠다.
본론보다도 인상깊게 읽었던 『여자아이 기억』의 도입부는, 중심 서사(premier récit)와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아 언뜻 보기에는 ‘1958년 여름’과는 전혀 관련 없는 듯한 무심한 두 장 분량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이 『여자아이 기억』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서문과도 같은 이 글이 바로 그 ‘여자아이’에 관한 설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술자는 ‘자신’이었던 1958년 여자아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곧 서술자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서술자가 글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인 2013년과 2015년, ‘여자아이’가 사는 1958년, 그 사이의 여러 해의 사건들을 단편적으로 등장시키며 자유롭게 넘나든다. 주된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이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며, 그 중간중간 현재 및 또 다른 과거의 이야기들이 함께 삽입되어 있다. 에르노의 작품이 낯선 독자라면 이러한 구성을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서술자의 독백과도 같은 도입부를 통해 앞으로의 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길잡이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연령 뿐 아니라 사회적, 성적으로 미숙했던 ‘1958년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견고한 의식 없이 ‘타인의 욕망과 의지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담아냈으며,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자가 당시의 사건에 대해 갖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풀어낸 글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독자는 타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듯한 두근거림, 기대, 혹은 모종의 죄의식을 안고 독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신 vous’이라는 명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독자는 마치 이 글이 자신의 이야기와도 닮아있을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Il y a des êtres ~’로 시작하는 문장 속 복수(pluriel)의 지칭 또한 이 이야기가 오직 한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서술의 대상인 ‘여자아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범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동시에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서술자’로, 또다시 ‘독자 혹은 어떤 사람들(des êtres)’이라는 불특정한 광범위로 확대되는 경험의 공유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지니는 '사회적 자서전'으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58년의 여자아이’는 무엇이 옳은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선택할지 알지 못한다. 그저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이후 자신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는 오래도록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받아들이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 서술자는 드디어 대상으로 전락했던 여자아이를 구출해내고, 주체로 설 수 있게 된다. 작품의 초입에서 방학 캠프의 현관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하던 서술자는 결국 자신을 옥죄던 사건을 떨쳐내고, 방학 캠프를 확실히 떠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글쓰기 행위를 마치는 서술자는 그토록 잊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 기억이 벌써 지워져 가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1958년의 여자아이’를 구출해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냈음을 의미하며,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기억에 갇혀있지 않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워진 나이에, 자신에게 시간을 초월해 살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과업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행했다고 보인다.
삶이 자신에게 준 것, 동시에 자신이 이루어낸 삶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어려운 것은 깨우치고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사회적 의미를 모두 제쳐두고라도, 나는 이 점이 에르노의 가장 큰 용기라고 믿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며, 단 한 번도 개인과 사회를 분리한 적이 없다고 한 그녀의 말에도 동의한다. 이 사회에 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쉽게 살기는 정말 힘들다. 그 속에서 치이고 치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우뚝 서는 것. 지금 내게 필요한 혹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 용기를 배우게 해주기에, 어쩌면 그 용기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글이기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이처럼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그녀와는 48년, 9,384km 떨어져 있는 내게 울린다는 것이 아름다워, 문학이 좋다. 후회하지 않을 용기, 현명한 결단을 내릴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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