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과거가 나만의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Bookable 2019/09/15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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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과거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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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2019-08-30
: 6,253
1. 텁텁한 삶을 채우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촉촉함.
삶은 달걀을 먹을 때 가끔 그런 느낌이 있다.
분명 텁텁한 완숙인데 그 노른자의 한 가운데의 점이 반숙인 상태, 그러니까 그 작은 반숙 한 점이 전체의 뻑뻑함을 상쇄하여 촉촉한 부드러움을 입안 가득 퍼트리는 느낌.
그게 은희경의 글이라 생각한다.
“생각의 일요일들”에서 카페에서 마주친 남자들이 나를 더 많이 쳐다봐주고 갔으면 좋겠다던 발랄함이,
“새의 선물”에서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처럼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라고 말하던 숭고함이,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다고 말하던 “중국식 룰렛” 에서의 관념적 사유가 모두 투여되었기 때문에 은희경은 이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겠지.
2. 현재보다 완성도가 높은 과거, 그 밀도 높은 재현.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타임슬립의 플롯에서는 보통 과거보다 현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은희경은 달랐다.
이런 구조의 책을 읽으면서 현재보다 과거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힘, 타임 패러독스, 그러니까 과거의 당신이 무엇을 했길래, 궁금해 더 보여줘야 하지 않아? 이런식이다.
호기심의 폭발점을 현재가 아닌 과거에 두는 매력적 전개.
그게 바로 은희경이, 이 소설이 일궈낸 구조적 승리다.
“나에게 그날 밤은 그 무렵에 나를 둘러싼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로부터 배신당한 시간이었고 끝나지 않는 고배의 여정이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배신한 것인지도 몰랐다.” __(300p)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__(335p)
3. 결국 우리들이 만들어낸 역사, 역사가 있었어.
우리는 각자의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
가장 처절하고도 찬란한 역사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도 싹트고 무릇 자라나 만개한다.
나라의 역사, 지구의 역사, 더 나아가 우주의 역사만이 역사인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분투와 치열함 또한 고스란히 하나의 역사를 이룬다.
그래서 “에드워드 카”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1977년의 미숙함을 고스란히 닮은 2017년의 성숙.
그 역사의 현장을 복기하고 기록한 은희경이라는 역사가를 거부할 이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__(278p)
* 덧, 소설 속 소개팅에 나온 고전문학 등장인물과 작품 매칭
(안나 카레니나__톨스토이) 안나 - 브론스키
(좁은문__앙드레 지드) 알릿사 - 제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__괴테) 롯데 - 베르테르
(사랑할 때와 죽을 때__레마르크) 엘리자베스 - 에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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