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과 표지만으로는 무슨 내용일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던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비행사>. ‘러시아 문학’ 앞에서 잠시 쭈굴 모드가 되었으나(왜인지 어려울 것만 같은 편견...) 우려와 달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비행사>는 한 병원에서, 기억을 잃은 듯한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남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병원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며, 의사와 간호사가 자신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다.
자신의 신상이나 과거에 대한 질문을 해도, 의사는 ‘직접 기억해 내야한다’며 기억이 나는 모든 것들을 기록의 형태로 남기길 권한다.
남자의 신분이나 기억을 잃은 사유에 대해, 독자 역시 함께 몰입하여 추측을 하게 되는데... 조각난 기억이 맞춰지면서, 슬슬 남자의 정체를 눈치채게 된다.
주인공인 플라토노프는 1900년에 태어난 남자로, 공포 정치 시대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힌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며 무생물보다도 못 한 대접을 받고, 각종 고문과 살인, 잔인한 행태를 목격하고 경험한다.
솔직하게 쓰여진 묘사에 읽기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덤덤하게 묘사했지만, 결코 덤덤히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소설 속 사건들이 작가의 상상력만이 아닌, 실제 있었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좀 더 읽기 수월할 듯 하나, 지식이 없더라도 어려운 책은 아니다.
생명을 겨우 부지하며 사는 거 같지도 않게 살아가던 그는 결국 인간을 냉동하는 실험에 동원되고, 기적적으로 몇 십년 후 해동되어 살아 남게 된 것이었다.
그가 경험했던 끔찍했던 과거와, 그런 그가 죽지 않고 마주하게 된 미래인 현재. 플라토노프는 의외로 미래의(하지만 현재의) 삶에 잘 적응을 하는 듯 보이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의 일기를 통해 그가 혼란을 극복하지 못 했으며,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나 보냈지만 자신이 겪지 못 한 세월의 조각들을 쫓으며 집착한다.
ㅁ
사람들은 그에게서 의미를 찾고 싶어하고, 그가 역사적 사료로써 남길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기억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개인적인 기억들이다. 그가 어떤 정치적 상황을 겪었는지, 그런 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지... 세상은 궁금해 하지만 정작 그의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역사적 흐름과 그 흐름 속의 개인의 이야기를 함께 볼 수 있는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비행사>. 조금 지루한 구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는 재미가 있다. 러시아의 움베르트 에코라더니... 방대한 지식과 섬세한 서술이 돋보인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솔직한 감상을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