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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님의 서재
  •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정우조
  • 17,100원 (10%↓950)
  • 2026-06-04
  • : 2,282
신화라고 하면 나는 맨 처음 단군신화가 떠오른다. 이때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실제로 말을 하는 전설적 존재가 아니라, 각각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고대 부족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인 환웅은 외부에서 내려온 선진세력이고, 곰 부족과 섞여 새로운 집단을 이루었을 것이라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는 고대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전하는 설명체계이다. 그렇다면 계시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모두가 각장 정의하는 바가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우조 목사의 책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의 계시로>은 계시를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일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대신 당시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대조하며 진정한 계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일을 설득력있게 전한다.가령 고대신화에서 나무나 식물은 주로 신들의 전유물인 '영생'을 상징하며, 신들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는 대상이다.(p109)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선악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더 나아가 신약에서는 선악과를 더욱 혁명적으로 해석한다.(p77) 십자가(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계시한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신화가 이해하는 나무와 생명에 대한 이해에서 단순히 개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원역사는 고대근동 사람들에게 익숙한 상징물과 이미지를 동원하지만, 재해석하고 전복한다. 한편 고대신화는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신적 존재들을 만들어 기원을 설명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p152) 성경에 난해구절 중 하나인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용사들인데, 이들을 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힘과 폭력으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원역사는, 그러니까 계시는 이들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반대하고 마침내 쓸어버린다. 이들의 동조하고 저항하지 않는 세상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것이 계시이다. 아트라하지스라는 당시 고대근동 신화에서는 상급신과 하급신이 등장하는데, 노동을 담당하던 하급신이 자신들의 노역을 하청시키고자 인간을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p245) 그런데 인간의 숫자가 늘어나자 불편함과 일종의 위협을 느낀 일부 신들이 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리려 했다. 성경의 홍수이야기(계시)와 이 신화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을 통해 이렇게 선포한다."소음을 두려워하는 신, 신음을 들으시는 신"나는 이 문구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문학적이며 매력적인 소제목이 너무 많다. 소제목만 읽어도 책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화가 네피림과 같은 권력자를 옹호하고, 그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다면, 성경의 원역사는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극복하신다고. (p230)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제약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긍휼과 신실함을 증거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신다. 이제 심판의 화살(무지개=레인보우)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가리킨다. 인간의 죄악을 하나님이 대신 책임지겠다는 선포. 여기서 신화와 계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신화가 권력자들의 정당화였다면 계시는 유일하고 진정한 권력자의 자기 비움과 극복의 이야기이다. 많은 경우 계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이나, 직통계시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 욕망을 휘두르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곤 했다. 이것은 계시를 신화로 격하시키는 일이다. 레비나스는 오디세우스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대조하는데 의미심장하다. 20년 동안 방황하다 마침내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그 여정 가운데 만난 모든 이들을 흡수하고 자기 동일시하여 양분삼는다. 이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세우스를 살찌우는 양식이다. 그러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한 채' 여정을 떠난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도착한다. 신화는 이유와 결말이 있고, 그것은 더 강한자를 위한 원료이다. 그러나 계시는 이유와 결말이 아니라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에 대한 가장 깊은 심연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이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롭고 깊이 있는 통찰을 배울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단지 새로운 지식을 얻기보다, 저자와 함께 성경의 원역사를 따라가며, 신화에서 계시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다. 그 고민은 즐겁고 위로가 되고 나를 더 돌아보게 해줬다. 무엇보다 성경을 신화처럼 보려하는 나의 굳은 마음을 조금 열게해주었다. 이제 그곳으로 스며드는 세미한 소리를, 따듯하고 절대적인 계시의 소리를 들어볼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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