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이 책이 공존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우정을 무기삼아 (자기)재현에 대해 고심하는 책으로 읽혔다. (스스로도 젊은 축에 속하는 남성이지만) 젊은 남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책이라기보단, 한국에서의 젊은 남성 재현을 '다르게' 시도해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을 복잡하게 바라봐야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복잡성을 전제한 재현은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에 가까울 것이다. '다르게'와 '있는 그대로'는 늘 비슷한 선상에서 도달할 수 없는 이해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애초에 저자와 인터뷰이는 하이픈으로 묶이기 어려운 차이, 즉 둘다 '젊은 남성'이라는 범주 안에 욱여넣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또 내가 살아가며 온오프라인에서 접하는 '젊은 남성'과 이 책 속의 두 남성은 사뭇이라는 부사로 묘사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일단 거울 속의 일그러진 나의 모습과 책 속 두 젊은 남성과의 차이 또한 그러하다. 분명 닮은 점도 있지만 그저 무작위로 개인을 골랐을 때 나타날 법한 공통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은 '나이' 하나로, 지정성별 하나로 같은 범주로 '우리'로서 재현된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 이상함은 너무 당연하다. 너무 당연해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를 때가 있다. 같은 범주 속 다른 젊은 남성이 어떤 양상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어렵다. 그럴 때는 이 책처럼 아주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나에게 밀착한 세계로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그것도 이미 충분히 어렵다.
그리하여 이 책이 마주하는 질문, <'젊은 남성'에 대한 복잡성을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조금 더 거부감을 반영한 직관적 표현으로 쓴다면 <이대남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지?> 아마 이 책의 저술 과정에서도 작가는 그런 두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물어가면서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런 질문을 독자로부터 맞닥뜨리고 있지는 않을까. 이 책 너머에서, 즉 이 책의 독해과정과 책을 덮은 이후에 생겨나는 텍스트들은 이 질문과 다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이 책은 독자에게 위와 같은 질문과 만나게 한다. 그리고 "질문을 비판하는 것에 의해 행해지는 새로운 질문의 발견과 개념의 창조 [...] 들뢰즈에 의하면 그것이야 말로 질문을 발견하고 유일한 방식이고, 개념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요새 내 세계에 침투한 극우 콘텐츠를 열심히 보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대답이 생긴다. 대척점으로 놓인 듯한 이들을 단순하게 악마화하거나, 무지몽매한 이들로 고정시켰을 때,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나의 사고 또한 절대 사유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달까. 결국 나는 이들과 같은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 일치하지 않는 단편과 같은 합성요소로 억지로 응축"**해서 생겨나는 것이 개념이라는 관점에서 각각의 단편은 복잡해질수록 괜찮은 사유가 나오지 않는가? 그 사유가 무엇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몰라야 하지만.
*고쿠분 고이치로 <들뢰즈 제대로 읽기> 박철은 옮김, 2015, 동아시아, 42쪽
**위의 책,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