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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ji20936님의 서재
  •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 15,120원 (10%840)
  • 2024-08-26
  • : 3,54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격동의 시대인 1977년부터 1981년, 한 가족의 애환과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순수한 소년의 시선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우리네 역사를 간접적으로 비추며 한국인의 비애를 가감없이 그려낸 소설이다. 정겨운 정취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정경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기도 하다.

인왕산 허리 부근에 딸린 조그만 달동네에 사는 4대 독자 동구에게 6살 어린 여동생 영주가 생긴다. 아기는 더럽고 이기적인 존재라 여겼던 동구는 자신이 영주의 아빠라도 된다는 듯 영주를 예뻐한다.

영주가 세 돌이 되기도 전에 한글을 뗀 것과는 사뭇 다르게, 동구는 초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난독증으로 인해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구의 담임을 맡게 된 박 선생님 덕분에 동구는 조금씩 읽고 쓰는 법을 터득해 나간다. 다른 어른들과 달리 박 선생님은 동구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동구의 이야기를 세심히 들어준다. 자신을 타박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박 선생님에게 동구는 경모의 감정을 품는다.

1980년, 동구의 인생에 첫 역경이 찾아온다. 쿠데타로 인해 정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동구가 그토록 따르던 박 선생님이 5.18 민주화 운동의 급류에 휘말려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복선을 알아차렸을 때 자연스레 입을 틀어막게 된다) 설상가상 동생 영주에게도 비극적인 사고가 생긴다. 안 그래도 웬수같은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가 영주의 일로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가부장의 표본이던 아버지도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린다. 네 식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동구는 비록 어릴 적 추억이 곳곳에 묻은 동네와 정원을 떠나게 되지만, 동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음속 한 켠 깊숙한 자리에 그곳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생각하며, '모두'의 마음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떠올리며, 먹먹하고 아련하면서도 따스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동구"라는 캐릭터에 애정이 참 많이 갔다. 동구는 어리숙하면서도 생각이 깊다. 말썽을 부리다 사고를 친 영주를 대신해 혼나주는 듬직한 오빠이자 엄마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아들이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아는 속 깊은 아이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스러운 면모를 지닌 동구를 보며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선생님이 물으시는 대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면서 나는 뜻밖에도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이런 것들을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고 했다. _p116

🔖언제였던가. 엄마와 영주가 학교로 찾아왔던 그날. 선생님은 칠판에 예쁜 글씨를 쓰셨고 지저귀는 어린 새 같은 영주는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그 글씨들을 읽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박수를 쳤고 엄마는 교실 문 앞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누르며 겸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행복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훗날 박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은혜만을 베풀고 자취 없이 떠나가실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그렇게 덧없이 어린 숨결을 거둘 줄도 몰랐고, 엄마가 광인(狂人)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깊고 소중한 찰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신명 나게 손바닥이 부풀도록 박수만 치고 있었다. 지금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_p35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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