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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님의 서재
  • 폭풍이 쫓아오는 밤 (양장)
  • 최정원
  • 12,600원 (10%700)
  • 2022-10-28
  • : 45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은 독서에 쏟던 시간을 글쓰기에게 양보했다. 하루에 정해진 양은 없어도 매일 자유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고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낸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나날이었다. 글쓰기 챌린지가 끝나갈 무렵 창비 소설Y 클럽 5기 소식을 접했고 내가 생각보다 여유롭게 독서하는 시기를 기다려왔다는 걸 실감했다. 마침 오늘 있던 약속이 취소됐고 한동안 평일에도 바빴던 시기를 감안해 오늘 책을 다 읽어나갔다. 가독성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 읽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암시하는 바가 많았다. 서평을 잘 쓰진 못해서 아마 감상평이 될 듯한 <폭풍이 쫓아오는 밤> 후기를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은 저녁에 이서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낯선 장소에 와 있다. 그들은 캠핑을 하러 온 수련원에서 갑자기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곤란함을 겪고 아빠는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관리동으로 향한다. 아빠가 나간 방 안에서 이서와 동생 이지는 둘만 남아 고요히 자리를 지키지만 옆 숙소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며 그들만의 세상을 즐기고 있다. 이때 창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고 이서는 이지와 함께 바깥에서 안 보일 만한 장소에 숨는다. 소리 내며 다가오는, 동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기괴한 모습을 한 ‘그것’은 옆 숙소의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습격한다. 이서는 여섯 살 동생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그것이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쯤 아빠를 찾으러 밖으로 나선다.

한편 수련원의 또 다른 곳에는 수하가 있었다. 수하는 교회 사람들과 이곳 수련원으로 왔고 저녁이 되어 따분해지자 바깥을 걷다가 관리동 부근에서 피 묻은 흡입기를 줍는다. 피 묻은 물건이 심상치 않았던 수하는 약주를 한 관리동 직원에게 유실물을 전해주고, 이때 아빠를 찾아 관리동으로 온 이서, 이지 일행과 만나게 된다. 이서는 자신이 본 그 ‘동물 같(70쪽)‘은 것에 대해 관리동 직원에게 말한다. 직원은 “혹시 꿈 같은 걸 꾼 거 아니니?”(71쪽)라며 이서의 말을 믿지 않지만 바깥을 순찰하기 위해 관리동을 나선다. 관리동에 남은 이서, 이지, 수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과 마주한 관리동 직원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숨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관리실 2층을 쳐다보고 있었(78쪽)’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그것’과 이서 일행의 쫓고 쫓기는 관계가 계속된다. 숨을 곳을 찾아 수하의 교회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로 가지만 대학생 인솔자 중 한 명인 성광이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은 술 냄새를 따라오기라도 한 듯 단숨에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이서 무리는 위기에 처한다. 이서는 ‘그것’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붉게 변해 일그러진 왼손의 화상 흉터(98쪽)’를 드러내고, ‘그것’은 자기 ‘얼굴 반쪽과 몸 곳곳을 덮은’ 흉터와 비슷한 이서의 팔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때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들은 ‘그것’은 숙소 바깥으로 단숨에 몸을 빼낸다.

총을 쏜 사람은 수련원 인근 개 농장에서 일하는 ‘박 사장’이었다. 그는 이서 일행에게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떨떠름한 태도로 요청을 받아들인다. 꿍꿍이를 숨기는 듯한 박 사장에게는 위험한 비밀이 있었다. 그는 어느 노쇠한 회장이 소유한 개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표면상 개 농장일 뿐, 사실은 회장이 아끼는 수집품인 ‘그것’을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박 사장은 회장에게서 그것에 관한 일화를 듣는다. 죄를 지은 사람만 잡아간다는 악마. ‘그것’은 악마였다. 그렇게 2년 정도 농장에서 일해오던 박 사장은 비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치던 그 날 회장의 비서로부터 갑작스런 해고 전화를 받는다. 그가 전화를 받는 동안 악마는 자신의 사육장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 사장은 이서 일행에게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다. 이서와 수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수련원 차를 타고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박 사장은 그때까지도 ‘신고를 받고 들이닥친 경찰이나 전문 엽사들한테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저 괴물이 사살되어 버리는 경우(184쪽)’만 걱정하고 있었다.

이서와 수하, 박 사장은 악마를 한 곳으로 유인하여 총을 쏴 재기불능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서는 악마가 술에 이끌려 이동함을 깨닫는다. 매점에서 최대한 챙겨온 술병을 강당 바닥에 깨버리니 바닥이 술 냄새로 진동한다. 술 냄새에 이끌린 악마는 강당 앞까지 오지만 이서가 강당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강당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강당에서 이서와 마주한 악마는 처음에는 이서의 반격에, 나중에 가세한 수하의 반격과 박 사장이 쏜 마취총에 잠시 정신을 잃는 듯 했지만 더 분노한 모습으로 일어서고 마침내는 이서가 던진 라이터의 불에 타 고통스러워한다. 이서와 수하는 박 사장을 이끌고 강당을 벗어나 다른 생존자를 찾게 되면 소리쳐 알려주자며 잠시간 흩어진다. 이서가 계곡 밑에서 정신을 잃은 아빠를 찾고 수하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올라왔을 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은 영어덜트 소설이라 그런지 고등학생인 이서와 수하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들이 낯설지 않았다. 몸은 성장해가지만 과거의 기억과 행동에 머물러 자라지 못하는 내면의 아픔이 안타까웠다. 더 행복해지자고 마법처럼 말하던 엄마는 지금의 아빠인 새아빠와 만나 재혼하고 이지를 낳는다. 이서는 열한 살 차이가 나는 동생 이지와 엄마, 아빠를 보며 ‘진짜 가족이구나. 저 셋은.’(103쪽)하고 느낀다. 어느 날 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이지를 챙길 새도 없이 잠이 들어버린 이서는 퇴근한 엄마와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그리고 울고 있는 이지와 마주한다. 거기서 이서는 ‘목이 조여드는 느낌(113쪽)’을 받고 집을 나서려 하지만 엄마가 그런 이서를 붙잡고 드라이브를 가자며 함께 나간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서는 엄마에게 그동안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퍼붓는다. 이런 이서의 모습에서 나를 겹쳐봤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한꺼번에 터뜨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이서의 엄마는 한쪽으론 이서를 달래고 다른 한쪽으로 운전을 하다가 음주운전 운전자의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한다. 이서는 찌그러진 차체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던 운전자의 술 냄새를 맡은 후부터 술 냄새가 기분이 나쁘고 역했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왼팔에 화상 흉터를 얻는다. 그날 이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된 이서였다.

이서와 악마는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악마의 몸을 반쯤 덮은 흉터는 이서의 화상 흉터와 비슷하다. 악마는 이서를 공격하려다가도 이서 팔의 흉터를 보고 멈칫한다. 악마는 이서에게서 무엇을 읽어내려고 했을까.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악마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전해오는 악마에 대한 추측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리저리 팔리고 고문을 당하고 술을 억지로 먹으며 사랑받지 못한 존재를 악마로 만들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악마는 박 사장을 고용한 회장의 수집품이 되기 이전에 어디에서 무얼 하다 온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폭풍이 쫓아오는 밤>을 환상문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큰 장치가 된다. 박 사장은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쇠약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농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회장은 ‘십 년은 젊어지기라도 한 듯 힘이 넘치는 것 같’(170쪽)은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는 악마의 피를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먹으면 이렇게 손발에 힘도 차오(175쪽)’른다는 회장의 말에서 짐작하면 회장은 정기적으로 악마에게서 피를 착취함을 알 수 있다. 피를 뽑히거나 여러 상황에서 저항하는 중에 악마는 몸의 반쯤이나 되는 흉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이서에게 묻고 싶지 않았을까. 네가 겪은 아픔도 나와 같은 것이었냐고.

그럼에도 악마는 악마에 불과하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늑대와 곰을 합쳐 놓은 얼굴에 네 다리의 길이가 다 달라 걷는 모습조차 기괴하기 짝이 없는 외형.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고 회장은 악마가 더 많은 사람(먹이)을 먹어 훗날 자신이 이 괴물의 피를 먹었을 때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을 끊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만한 권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분명 수련원 부근의 인터넷을 막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학살의 현장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이서와 수하가 쌓는 우정과 우정이 쌓이면서 허물어지는 마음의 장벽도 인상적이다. 수하는 아빠로 예상되는 인물에게 학대를 당한 것으로 보이고 이서는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위치로 인해 타인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의 상처에 가장 순수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 둘은 결국은 맞잡은 두 손으로 각자의 마음에 자리를 내어 준다. 괴물은 이서와 수하가 가진 상처의 집합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안고 있는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더 커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밤이라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71쪽)’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우연한 밤에 괴물이라는 트라우마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서와 수하는 성장한다. 마지막에 일상으로 돌아간 수하와 이서는 재회한다. 이제는 웃는 방법을 아는 이서와 다시 축구를 시작하는 용기를 낸 수하. 그 우연한 밤은 이 두 아이가 앞으로 마주할 다채로운 세상의 초석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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