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우울증’, 대개 함께 놓여 있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더욱 밝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의사라는 좋은 직업에 배부른 소리라는 말이 따라붙을 테니 말이다. 의사 정상훈은 2년간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고, 치료를 통해 점차 회복되는 듯했지만 끝내 ‘삶’과 ‘죽음’이라는 도저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멈춰 서야 했다. 그렇게 죽음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국경없는의사회’의 해외구호활동가로서 죽음과 가까운, 죽음이 가득한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으로 떠나게 된다.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는 바로 ‘지독한 우울증을 앓던 한 의사가 수많은 죽음 앞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를 담은 에세이다.
“나는 살아서 이곳에 와야만 했다.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이끌린 것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앓다가 죽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중략) 황량한 아르메니아 북부는 상황이 달랐다. 나는 직감했다. 이곳에서 죽음이 장식을 벗고 민얼굴을 드러내리라. 그것이 나는 두려웠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어머니와의 어긋난 관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해답이 그의 여정에 속해 있다. 처음과 마지막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독자들에게 건네고 있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나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산다면 우리가 사는 것일까? 난 죽음을 만나 나를 부른 이유를 물어야 했어. 아빠를 위해 부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봐 주겠니?” 그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이 책을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어떤 죽음은 자연스럽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죽음의 부조리한 민낯은 슬피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고 짭짤한 그 무엇으로 감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환자는 더 강력한 두려움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트리폴리에서 죽음은 삶과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세상. 두려워할 틈도, 살겠다는 발버둥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안타까운 사연과 감동적인 이야기가 모두 사치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그저 시리아 내전으로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로 건조하게 기록되었다.”
삶과 죽음. 인간은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일어난 일이고 일어날 일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를 보며 “그는 삶에 대한 애착과 고통이 주는 환멸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 같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삶이란 것이 늘 그러한 것 같다. 어떤 날에는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고 행복하면서도, 또 어떤 날에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매일이 끔찍하고 슬프고 불행하기만 하다. 늘 그렇게 사이에서 ‘방황’을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거나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하고 나면, 여실히 삶의 소중함을, 가치를 느낀다. 결국 우리는 가까이 이르러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끼는 것(또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면.
저자가 어긋나 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깨달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제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엄마와 친해져야 한다. 엄마가 곧 잊힐 거리를 익히듯이. 희망은 왜 절망과 함께 오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삶은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 또 죽음이 만연한 나라인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에서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다시금 삶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찾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더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나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