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스스로 나이테를 지워 나가는 밤
쏟아 내린 눈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몽이 지속될 때
비로소 나는 행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것이다
처음 이곳을 밟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패스포트
수분을 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숨으려 더 단단해진 포도알
때론 제 몸뚱아리 하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버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제 살을 발라내고 저토록 앙다물게 되었을까
...
저 딱딱하게 굳어 버린 포도알처럼
내가 끝내 쥐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포도씨를 뱉지 않고 삼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누구 하나 꺼내 주지 않는 냉장고 같은 어둠에서
쪼그라든 손이며 발이며 온몸
뒤척인 적이 있다
-포도알 기록서
시인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곱씹으며 읽어나갈 때 위로를 받는다.
담담하게 슬프다. 마치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면을 쓰고 있는 내가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담담한 척 하며 웃음으로 울음을 삼켜버리는, 그 순간 같은 시이다.
울음은 울음으로 풀려나간다. 답답한 하루를 마친 뒤 읽다보면 어느새 후련해진 나를 느낀다.
화성과 히말라야, 티베트, 중국이 나온다. 이국적인 공간에서 다른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는
신비한 감정을 일깨워준다. 화성과 지구와 은하가 등장할 때,
우리는 무한한 우주 속, 지구의 현재를 사는 존재임을 알아차린다.
평화로운 재미를 주는 시도 있다.
순선, 정선, 귀순, 순례, 미자 할머니가 사는 요양병원 A병동 326호에서는
밤만 되면 유쾌한 오케스트라가 펼쳐진다.
지치고 지친 퇴근길 지하철, 방수진의 시는 많은 위로와 공감과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울린 한 문장을 소개한다.
"근데 할머니,
그리움이 목을 매면 은하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