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땅에서 기록한 가장 투명한 마음
김금희, 《나의 폴라 일지》(한겨레출판, 2025)
생명의 시작점에서 각자의 일상으로
단순하고 환한 미래의 단서에 관하여
한겨레출판에서 김금희 소설가의 《나의 폴라 일지》가 출간되었다. 2024년 2월, 작가는 《한겨레》의 특별 취재기자 자격으로 남극에 방문했다. 한 달간 남극에서 취재하고 응시했던 투명한 세계를 즉물적으로 펼쳐 보인다. 전작 《식물적 낙관》에서 돋보였던 작가의 세심한 시선이 낯선 남극이란 공간에서 확장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은 익숙함으로부터 깊이를 얻는다. 생경함이 더해지면 둘레가 생긴다. 생활을 돌본다는 말은 익숙함을 지키면서도 생경함을 추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너무 익숙하기만 하다면 깊고 깊은 자신의 일상에 빠져 고립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에게는 좁고 기다란 구덩이가 아닌 현실이란 총알을 피할 수 있는 방공호 같은 커다란 동굴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갔으면 하는 장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에는 여백이 생긴다. 그 여백을 독서나 누군가의 방문기를 통해 채우곤 한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 정말 가고 싶다. 내가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은 만큼, 누군가가 다른 어떤 장소를 염원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곤 한다. 원했던 나라 혹은 장소에 갔을 때 그 사람은 아주 환하고 구경거리가 많은 동굴이 될 테니까. 운이 좋다면 나도 방문해 볼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여행 에세이는 조금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디뎌본 사람의 글은 어딘가 특별하다. 내게는 이번에 읽은 김금희 소설가의 《나의 폴라 일지》가 그랬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으면 3월이건만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중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작가가 남극 기지에 방문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 과정부터 펭귄 마을에 들러 작별을 고하기까지의 여정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자신만의 남극’은 무엇인지, 남극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라는 사람의 품을 넓히기 위해서는 작가의 남극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이탈리아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공간이 있을 것이다. 작가처럼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갔을 때, 생활은 생활을 벗어나 무한한 확장을 거듭하는 미래가 된다. 바라던 장소에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찮다는 것은 아니다.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원하는 미래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을 작가가 보여주었기에, ‘자신만의 남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언제나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된다.
공간으로서의 남극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즉물적인 공간이다. 작가는 “인간종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할 만큼 압도적인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은 사실 우리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진 않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크게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작가가 보여 준 남극이라는 현실은 실존하기에,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는 인간으로서 남극이라는 공간과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치열하게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 본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자연은 그런 공간이니까.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 나의 동굴이 잠시 넓어지는 느낌을 겪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남극은 어떤 곳이냐고 만약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에서 보았던 풍경을 내가 느꼈던 대로 말해줄 수 있을 듯하다. 작가가 환하게 보여준 풍경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 한편에는 남극이 있어 이 책을 읽은 뒤로 다른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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