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표지에 세로로 적힌 부제를 보며 멈칫했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옳은 말, 맞는 말은 정면으로 맞서기 참 힘들다. 너무 훅 찌르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얼굴 앞에서 고개를 피하듯 그렇게 책을 한참 꽂아만 놓았다. 그럼에도 한겨레 서평단을 신청했고, 글을 써야 하니 어쨌든 한장씩 두장씩 틈날 때마다 읽어나갔다.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기 전까지 고민하다가 한두장씩 넘겨보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이 리뷰는 후자의 사람들을 위해 읽혔으면 싶다. 어찌되었든 책장을 넘기며 뼈 때리는 말이 가득하겠지 싶었던 칼럼들 앞 서문의 제목은 이러 했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맞다. 이 책은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미안함을 말로 고백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무엇에 대해 왜 미안한지를 글로 써내는 일 또한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행으로 살아남았다는 데에 미안함, 누군가는 지겹다고 쉽게 외면할 수 있는 데에 느끼는 미안함, 성소수자와 난민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미안함. 자책과 분노와 안간힘은 이러한 미안한 감정 혹은 상태와 함께 한다. 회의하는 자만이 미안함도 지속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미안함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을 쓰고 정리하고 다시 정리하는 사람만이 찰나의 자책, 순간의 분노가 아닌 결국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미안함에 대해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책을 다 읽은 뒤 여러 밑줄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렸는데도 A4 3장 가량의 글들이 나왔다. 나중에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된다면, 이 밑줄들이 책의 내용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고, 책을 읽기 전 지금 이 리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책과 작가가 어떤 톤으로 미안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를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서문에서 작가가 말했듯, 이 책 또한 '그저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는 것'이다. 미안함에 대해서, 미안함으로 엮인 이 무수한 칼럼의 글들 또한 그저 살아남은 자의 안간힘으로 쓰인 책일 것이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한 사람이 말하는 미안함에 대해 그저 찬찬히 읽어낼 뿐인 것이다. 우리 모두 요행으로 살아남았으니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살아남았으니 읽을 수 있다. 미안해할 기회가 있다. 이 리뷰와 책 속 몇몇의 문장들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찔한다면 한번 쯤 읽어보길 권유해본다.
오만함에도 층위가 있다. 조금이라도 겸연쩍어할 줄 아는 오만함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내면의 절제나 외부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아 공격성까지 띠는, 뻔뻔한 오만함도 있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로 치닫는다.- P25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P42
돈벌이에, 자본의 이윤 추구에 바빠서, 사람의 안전은 고려 사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온통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차라리 뻔뻔함이 성공의 열쇠가 된 사회다. 중고 배를 수입해 증축해도 안전 검사를 쉽게 통과하고, 컨테이너를 결박하지 않은 채 과적해도 단속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월호만의 일이겠는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되어 자리 잡힌 경향이고 흐름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과 국가기관은 탈규제에 있어서 한통속이었다. 모든 규제를 암이라고 규정한 박근혜 정권의 시대에는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P158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P163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종하게 하는 지배 기제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세계관, 의식, 욕망을 내면화하게 한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열등감, 즉 스스로를 부정적이거나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P176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본디 ‘진실과 공익의 추구’라는 말과 결합되어야만 유효하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타자와 관련된 혐오, 증오, 위협의 선정적 보도는 검증의 어려움이 있기에 더욱 제어되지 않는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으로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를 들었다. 특히 단순화하기가 사이비 언론의 선정성과 만나면 우리는 섬세한 안목을 갖는 대신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 갇힐 위험이 크다.-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