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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
  • 23,400원 (10%1,300)
  • 2023-02-08
  • : 7,043

독서의 끝과 시작, 나와 타자의 연결 가능성으로서의 책읽기

: 작가의 입장에서 다시보기, 분석하기, 그리고 다른 책으로 연결되기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조지 손더스(지음), 정영목(역). 어크로스, 2023

 

 

 

소설을 왜 쓰는가. 소설을 왜 읽는가

몇 해 전, 법무부 장관이 국회상임위원회 장에서 ‘소설을 쓰시네’ 라고 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을 비하 하고자 한 말은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정작 소설가들이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전후 맥락을 추측해보면, 있지도 않은 일, 허구에 가까운 일, 어이없음에 대한 반응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한 말로 보인다. 이처럼 소설은 그냥 픽션으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인가. 과거와 달리 요즘은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많은 소설들, 이번호 서리북에서도 언급된 ‘k-힐링’ 소설을 쓴 작가들도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았다. 바야흐로 지금은 읽기보다 쓰기의 시대다. 블로그에 머무르던 글들은 점차 출판을 거쳐 ‘책’의 형태로 자리매김을 한다. 혼자만의 글이 아닌 독자에게로 닿고 싶은 것이다. 소설가들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소설을 왜 쓰세요?’라 한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가끔 받는 질문은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언어로 답을 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소설은 첫 문장만 읽어도 다음 문장이 읽고 싶은 소설이 있는가하면, 어떤 소설은 책을 덮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는 것도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매우 난해한 어려운 소설을 만날 때면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중도에 그만둔 적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단편소설의 분량보다 더 많은 내용으로 소설을 해부하듯 분석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헤밍웨이의 6단어로 쓰여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접한 뒤 우리는 이 짧은 소설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가진 배경, 경험, 지식, 사유의 방식, 시점의 변화 등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소설이 가진 매력도 있지만 때로는 주의 깊게 읽어내려 가지 못함으로 인해 사실과 정반대가 되는 오역을 낳기도 한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춤을 잘 추기 위해서 댄스 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 ‘미술 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예술과 관련된 영역뿐만 아니라 집을 잘 짓기 위해서, 빵을 잘 만들고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등 전문적 영역과 일상의 영역에서 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배우고 익힌다.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을 접하는 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에 문학 강의를 하는 저자들은 공통된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먼저 독자에서 손을 내밀어 안내를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독자 역시 한 권의 책을 더 잘 읽고 싶은 충직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조지 손더슨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게 된 배경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쓰는 사람,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읽기의 이면으로써의 쓰기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의 저자 조지 손더스는 현존하는 영미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는 평을 듣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적 작가이다. 유전 탐사 회사 등에서 일했던 조지 손더스는 원래 공학도였으나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를 읽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꿈꾸게 된다. 현재는 미국 시러큐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현직 교수이다. 첫 장편 소설 <바르도의 링컨>이라는 책으로 2017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나 비교적 국내에서는 최근에 소개되었다.

저자가 첫 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20년 동안 시러큐스 대학에서 강의한 19세기 러시아 단편소설 읽기 수업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수강생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젊은 작가 6~7명으로 매년 600~700명의 지원자 가운데 선발된 인원들이다. 상식적으로는 이미 훌륭한 젊은 작가를 위한 강의인데 왜 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손더스는 많은 젊은 작가가 이후에도 ‘작가’로 살아가는 지속적인 삶에 대하여 좀 더 견고한 자신만의 ‘상징적 인 내적 공간’을 얻도록 돕기 위해서라고 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수업을 진행하면서 세상에 귀중한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진정한 경험을 한 그는 학생들에게서 더 나아가 독자들과 나누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이쯤 되면 소설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본격적으로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갖게 하는 데 충분하다.

 

책표지에 언급 되어 있듯이, 이 책에는 러시아 대표작가(전 세계 대표이기도) 4인의 단편 7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7편의 단편이 한 챕터씩 구성되어 있으며, 첫 번째 소설,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를 제외하고, 각의 챕터는 ①‘단편 전문’, ② 손더스가 젊은 작가들과 함께 강의와 토론을 바탕으로 한 내용, 그리고 ③ 시간이 흐른 후에 든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20여년의 시간 동안 약 30편의 단편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왔기에 조지 손더스는 이 단편들을 수십 번도 넘게 읽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뒤에 든 생각’이란 제목으로 적혀진 별도의 장을 통해서 우리는 손더스가 그 단편소설들을 다시 읽고 살펴보면서 새로 형성된 생각이나 관점을 확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본문에서 밝혔듯, 이 책에 소개된 7편의 단편은 해당 작가들의 가장 대표적 작품인 것은 아니다. 손더스의 말에 따르면 ‘강의에 적합한’ 소설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으나, 저자와 함께 책을 읽다보면 7편 모두가 놀랍도록 재미와 감동을 준다. 단지 소설의 내용에 기인하기 보단 단편소설을 읽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어, 그로 인한 소설에 대한 이해, 작가에 대한 이해, 한편의 소설에서 얻은 깨달음이 주는 기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벽돌 책에 가까운 두께이고 7편의 단편이나 실려 있음에도 책을 천천히 작가와 함께 읽어내려 가다 보면 그동안 소설을 읽을 때처럼 ‘플롯’에 중점을 두고 읽으려고 했던 무의식적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아마도 구조화 된 ‘비평 이론’ 분석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7편의 단편을 모두 다르게 읽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단편 소설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을 경험하게 해준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혼자인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① 단편소설을 한 번에 한 장씩, 끊어 읽으면서 천천히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읽는 방법으로(체호프, 마차에서), ②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빌드 업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들로(투르게네프, 가수들), ③소설 속 인물에게 벌어진 사건의 패턴이 점차 진화하고 정점으로 가는 과정에서 변해가는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는 모습으로(안톤 체호프, 사랑스런 사람), ④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문장이라 쓰인 소설이라 세심한 독자가 아니라면 놓치고 말았을 반복되는 상황임에도, 소설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장치와 사실에 근접한 소설이 갖는 평범 속 위대함으로(톨스토이, 주인과 하인), ⑤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환상소설의 형식이 내용적으로는 얼마나 더 리얼리즘에 가까운지(니콜라이 고골, 코), ⑥소설 속 여러 모순된 상황들을 통해 다시 재배치되고 해석되는 과정에서 진실에 이르는 과정으로(안톤 체호프, 구스베리 이야기), ⑦ 열린 결말에 대한 우리들의 다양한 해석과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노력으로 (톨스토이, 단지 알료샤), 단편소설을 이렇게 읽어보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덤으로 알게 되는 것은 ‘조지 손더스’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가 언급한 대로 ‘작가 정신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묘사’ 그리고 정영목 역자님이 말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읽고. 배우려하고, 깨달음에 기뻐하고, 끝내 인생에 소설을 바치고 싶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한 사람의 진심까지 볼 수 있다. 손더스는 이 두꺼운 책을 잘 따라온 것은 자신이 책을 잘 써서라기보다 읽는 독자가‘유효성을 인정하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라고 독자에 대한 애정을 진심으로 드러낸다.

소설을 읽는데도 방법과 기술이 필요하다.

책의 부제가 ‘쓰기를 위한 읽기수업’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편소설’ 형식이 갖는 여러 제약 안에서 잘 읽기 위한 방법을 알아가는 일이기에 독자로서 더 잘 읽기 위한 읽기 수업으로도 충분하다. 시중에는 유명한 작가들이 직접 쓴 ‘읽기’와 관련된 책들이 많다. 나의 경우 손더스의 책에 앞서 읽었던 일본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이라든지, 국내 이승우 작가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그리고 블라다미르 나보코프의 <문학강의>, 마지막으로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등 있다. 작가들은 소설가가 되기 이전 이미 읽는 사람들이었고, 아마도 일반 독자와는 다른 시선에서 책을 보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로서 읽을 때의 재미는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독자의 입장이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천천히 글을 읽고,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통과하다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가 닿고자 한 부분과는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속독을 하면 슬로 리더가 즐긴 책속의 다양한 장치나 의미심장한 구절, 절묘한 표현 등을 모두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음을, 속독 후에 남는 것은 단순히 읽었다는 사실 뿐임을 상기시킨다(P.20).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슬로 리딩할 것이라는 전제하게 글을 쓰는데, 결국 언어로 쓰여진 책에 대한 이해는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간의 시중에 나온 읽기 와 관련된 책들이 슬로 리딩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부분적 ‘실전’을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단편소설 전체를 독자와 함께 긴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책읽기와 관련된 기존 작가들 책과는 완전한 차별성을 보인다. 손더스는 ‘가치 있는 문제는 절대 최초로 구성한 수준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는데, 소설가는 처음 자신이 구상한 수준에서의 소설을 내놓는 것과 같이, 독자들 역시 처음 읽는 것이 아니라 슬로우 리딩과 재독을 통해서 하나의 소설에 좀 더 완전하게 다가가는 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편 소설은 작가가 처음 구상했을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심지어 몇 번의 퇴고를 거친 책인지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독자가 첫줄을 시작하자마자 계속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을 만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그 감회를 바로 글이나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온전한 상태의 언어로 변환되기 전, 찬란에 가까운 감정 상태를 경험한 적도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배경이 모두 다르고, 긴 시간을 각자 살아왔기 때문에 손더스가 이야기한대로 기본적으로 자가 자신만의 TICHE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TICHE를 좀 더 확장하고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 독서를 통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생애,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의 전후, 그리고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하나의 잘 알려진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유사한 작품들을 통해 절정에 이르는 작품을 이해하고 다가가기 위해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 그림을 등분해서 보기도 하고, 색감을, 빛의 방향을, 붓터치를, 구도와 조화를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작품을 접할 때도 그렇게 구조를 살펴가며 보고 있을까? 소설은 화가의 그림과 달리 한눈에 구조를 보기 어렵다. 소설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는 과정들 속에서 물 흐르듯이 지나간 문장들, 심지어 행간사이에 존재하는 의미들, 이야기의 배경인지 중심인지, 주인공인지 지나가는 인물인지, 사건의 핵심인지 복선인지, 때로는 소설과 핵심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은 왜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책을 라면을 먹듯 후루룩 읽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한 대로 한권의 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따라 달렸다(P.29)는 것을 떠올리면 독자로서의 충실하게 읽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이렇듯 소설의 내용과 구조를 파악하는 일에 대하여 긴 시간이 걸리는 의무적 과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의무는 다름 아닌 슬로 리딩과 재독(再讀)이다. 조지 손더스는 작가들은 어떻게 슬로우 리딩을 하는지, 소설가는 어떻게 글을 쓰고 독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독서는 책을 다 읽었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이야기의 얼개를 맞추고, 사건의 전후를 살피고, 등장인물의 역할을 파악하면서 그리고 급기야 삶의 가치를 돌아보는 순간까지 나아간다. 소설 한권 읽을 뿐인 이 일이 결국 타인과의 의사소통이자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 과정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일이 된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충분한 사고를 거듭하며 읽어야 비로소 책에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읽는다면 독서가 취미가 아니라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손더스를 따라 책을 읽다보면 슬로 리딩이 주는 행복은 상상 그 이상임을 깨닫게 된다. 마치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단편소설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알게 되고, 앞으로 만나게 될 어떤 단편도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잇을 것 같은 태도와 자신감도 더하게 된다.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

우리가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혹은 다 읽고 나서 가슴에 품게 되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 그러한 감정들이 진실일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되어지는지 분명히 느낀 것은 많지만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들,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되는 감정으로 인해 다시금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들로 인해 소설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독자는 작가가 여러 번의 퇴고를 거친 소설들을 보기 때문에 이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이 문장이 선택되기까지, 문장의 재배열이나 어떤 논리적인 것, 이것이 말이 되는지 어느 것이 더 맞는지, 그 문장의 구조나 이야기의 어떤 사건이나 이런 모든 것들의 배치가 바뀌지는 않았는지, 이런 부분들은 바로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이 모든 과정에 대한 질문은 가능하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의 입장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분석적 읽기가 가능해진다. 물론 일상 속에서 모든 단편소설은 대부분 느낌과 형상에 근간을 두고 기계적으로 읽어나가기가 대부분이다.

손더스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기는 어렵지만 관점을 조정하고 에너지의 방향을 올바른 쪽으로 바꿈으로 인해서 인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은 사유 과정을 통해서도 더 나은 인간에 이르는 과정에 이를 수 있지만, 문학을 통해서, 문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방법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세 번째로 소개된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에서 주인공인 주인으로 나오는 바츨라프가 평소에 그렇게 작은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소설을 거울삼아 지금까지 왜 작은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P.383)이다. 마찬가지로 네 번째로 소개되는 고골의 <코>를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골은 어떤 작가들보다도 초현실적이며 그간 나타났던 여러 가지 환상문학의 전조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녔던 작가였고 자신의 강점을 잘 아는 작가였다. 손더스는 앞서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이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로 등장인물들의 내적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면, 고골의<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는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잘못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으로 만드는 세계 외에 세계는 없으며 마음의 성향이 우리가 보는 세계 유형을 결정(P. 442) 하며 그런 것이야말로 삶이라고 고골은 이야기한다.

고골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가 한계가 있는 소통 체계라는 것인데 놀랍게도 <코>를 읽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읽고 있는지 알게 된다. 고골은 코가 떨어져 나가고, 코가 주체적으로 걸어 다니고 말을 하는 환상 세계로의 확장을 통해 이야기를 하는데 이처럼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언어를 통해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손더스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말하고 싶은 어떤 생각을 염두에 두고 진지한 주장을 구축하면서 우리의 생각이 진실처럼 보일 언어를 찾는데, 그 생각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언어라는 얇은 직물을 너무 넓게 펼쳐서 우리 주장에 진실하지 않은 부분까지 덮어버린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P.448)다

 

고골의 소설에 따르면 대체로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진지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우리가 진짜이고 지속적이고 우리 운명을 통제한다고 느끼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 아닐 수도 있다는 것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코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에서 정말 위험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예를 들면 건강검진, 질병 진단 이런 것들, 하지만 다시 돌아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 간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여러 가지의 것처럼 우리는 정말 이러한 것들이 마치 코가 없어졌다가 다시 붙은 그 사람 코발로프와 같이 똑같은 삶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가 있는가?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질문들

대체로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는가, 한번 읽는가 혹은 두 번 읽는가, 천천히 읽는가 느리게 읽는가, 읽으면서 앞뒤 문장을 기억하고 있는가,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는가, 요약하는가 소설을 쓰듯이 읽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기란 쉽지 않다. 손더스는 이 책에 실린 체호프의 다른 소설 <구스베리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토바이어스 울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울프는 수업시간에 단지 체호프의 소설을 읽어주기만 한 것 뿐임에도 학생들은 그간의 소설을 읽던 것과는 다른 경험을 할수도 있다.

나와 같이 소설이 좋아 소설가까지 좋아하는 경우 소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때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손더스는 소설이 하는 일을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찬양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뭇 겸손한거 같지만 실은 ‘무용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다시 한번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더 정직해지자. 우리가 읽고 쓰는 사람은 읽고 쓰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읽고 쓰면 더 살아있는 것 같기 때문에 읽고 쓰며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제로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크며, 나 자신은 그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마이너스라는 것을 누가 증명한다 해도 계속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든다.(P.599)

손더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주목해야 하는 것들을 친절하게 말해주었고, 어떤 기술적 특징을 짚어보고, 왜 우리가 이 대목이나 다른 대목에서 감동하는지 최선을 다해 설명하면서 최대한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었다고(P.603).그는 이 책에서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본인이 우려를 한 내용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했듯이 나 또한 이 책이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일에 대한 지식,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기술, 그 일을 한 방법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같이 공유한 것을, 나처럼 소설을 좋아하는 작가라면, 단편소설을 장편소설처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며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이 책에서 소개한 러시아 작가들은 현존하는 작가들이 아니다. 그러니 손더스가 이야기 한 부분들이 작가의 의도를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손더스는 작가로서 그들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대했다. 바로 강의라는 형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월과 함께 읽어왔으며 이해하기 위해 애정을 다해 노력했다는 것을 이 책을 함께 읽은 독자들이라면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고 공감을 배워가는 과정과 연결 가능성으로서의 독서

조지 오웰은 그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P.297)이라고 밝힌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라고. 글이 어떻게 삶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그의 모습은 독자가 들어주면서 자신의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를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지 손더스는 어떠한가. 그는 읽고 쓰기는 여전히 우리가 적어도 연결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우리는 쓰고 읽을 때 연결이 일어난다고 믿으며, 그것이 이 책을 쓴 핵심적 이유이기도 함을 밝힌다(P. 596). 일 년에 단 여 섯 명의 뛰어난 젊은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예순에 이르러 세상에 내어놓았을 때 손더스는 독자들이 소설은 읽고 그 소설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받아들이고 말을 거는 것에서 연결성을 믿었다. 세상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좀 더 친절하기를, 재난에 대비하기를, 타자에 대해서도 덜 반동적인 생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가능하다 믿었던 것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만난 가상의 타자들과의 연결된 세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597).

무릇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소설이 재밌어서 라는 말로 그 이유를 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 대체로 인문사회과학 중심으로 주로 책을 접해왔지만, 타자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고 공감을 배워가는 과정은 때로는 한 권의 소설이 진실에 다가가는데, 사람과 사건을 이해하는데 더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손더스도 언급한 대로 소설이 도대체 우리에게 혹은 위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해서 소설이 뭔가 특별한 일을 한다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설이 가진 모든 전체적인 순수 효과가 마이너스임을 증명한다 해도 본인은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고, 읽고 쓰면 더 살아있는 것 같은 그 순수효과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P.599). 그럼에도 결국 그는 7편의 단편을 독자들과 함께 읽은 것으로 마무리 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우리의 마음이 읽기 전 상태를 읽은 후 상태와 비교해보라고. 그것이 바로 소설이 하는 일이라고, 소설이 마음의 상태에 점진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그 변화가 한정적이라 할지언정 그것은 진짜라고..

 

비록 손더스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소설이 갖는 힘에 대하여 이렇게 소박하게 마무리를 하고 있고, 비록 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금방 삶의 가치나 태도가 변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읽은 후 상태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책장에 진열된 아직 펼치지 않은 단편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전과 다른 안목을 갖고 되었음을, 소설이 하나의 세상이 될 수 있음을. 얼마나 우리의 삶과 밀접해 있음을. 독서를 통해 행복을 느낀 사람들은 안다. 행간 속에 숨어있는 그 행복의 순간. 문장하나가 온전히 나의 삶을 통과하는 통찰의 그 순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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