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우주에 관한 관심이 있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겐 지적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이 있다. 인생이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만큼 아득하고 신비한 것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것일 테다. 하지만 각자의 하루하루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관심은 모두 생명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신체의 변화와 노화, 통증과 질병, 불안과 행복에 관한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몸과 마음 혹은 의식으로 모두 생명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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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생각했는데 요즘은 반대로 인류의 극소수 뛰어난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발전하고 그 혜택은 수많은 사람이 누리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사실이기도 하다). 한없이 작아진 개인의 존재론적 인식이다. 아마도 예전 같지 않게 식어가는 열정과 빠져나가는 에너지로 인해 치열한 삶을 살기보다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변명, 안일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편안한 순간에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생각은 이런 삶을 계속 살다 보면 결국 놓치게 되는 것은 살면서 마주하는 것들, 존재 자체에 대한 ‘경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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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연구방법이 곧 객관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하는 과학임을 인식하기 쉬운 시대를 살다 보면 소위 전문가들의 견해와 권위, 이론에 다수의 사람이 의문을 품기보다는 대체로 그 지배적 체제에 따르기 마련이다. 그 방면에서의 이론과 지식에의 접근의 한계로 정보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사람과 사물, 미디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혹은 이면의 세계를 둘러보는 일은 더더욱 요원하지 않다. 의심하고 회의적으로 묻고 되묻기를 하는 일에 훈련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관심을 두기에 과학은 전문 분야가 되어 지적 호기심마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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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저변의 이야기들은 이 책을 읽은 동안 내내 저자의 시선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과학사에서 한 시대마다 발자국을 남긴 패러다임과 지배이론의 끊임없는 교차, 그리고 다윈 이후 지배적인 진화이론의 진화와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DNA를 둘러싼 생물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수많은 논쟁과 통찰들을 중심으로 책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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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탄생과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초인적 인간의 삶이 아니다 할지라도 때로는 너무도 완벽해서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TV에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면 확대되어 보이고, 타임랩스를 통해 생장하고 증식하는 세계만 보더라고, 변화, 탈피를 통해 여전히 그 견고한 세상의 모습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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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꽤 길었지만「생명을 묻다」는 다소 존재론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마다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장마다 일관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배치를 보면, 저자가 책의 구조를 설계하면서 학자로서의 연구 질문과 관심, 그리고 그간 철학과 문학, 예술과 자신이 속한 분야의 책과 논문을 바탕으로 재배열하고 배치하기 위하여 고심하였을지 상상이 된다. 비약은 아니지만, 그간 나의 독서에 방향성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내가 늘 좋아하던 것만 찾아보던 나의 읽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른바 이 교양 과학철학서 안에 언급된 책의 부분들을 보다 보면 책 읽기의 생산성과 철학적 사유가 한 권의 책, 그러니까 저자가 하고 싶었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과정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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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철학사와 과학사를 넘나들며 등장하는 여러 학자의 견해를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그저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전후 논조를 뒷받침하여 강화하거나 반박을 하는데 균형을 잡고 잘 이끌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오래되고 얕은 지식으로 들은 적은 있어도 개념화가 완벽히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나, 대부분은 저자가 책에서 개념 정의를 다시 자신의 언어로 잘 언급해 주고 있어서 친절하기까지 하다. 물론 뒤로 갈수록 전문적인 분야도 나와서 일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약 500여 페이지에 이르고 있지만 모르긴 해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점은 더 길게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제한된 지면에 꼭 필요한 말만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여 페이지의 책을 단번에 읽기란 쉽지 않지만, 이 책은 저자의 절제된 유머와 문학과 예술을 통해 드러난 생명에 관한 적확한 문장은 완벽히 저자의 그간의 읽기를 통해 얻은 것이라 생각한다.
집안 책장에 가득한 수많은 책 중 과학 분야의 서적은 많지 않음에도 여전히 읽지 못한 채 자리만 지키고 있는 과학서적들이 가득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게 다양한 지식이 쌓였다기보다는 질문하는 인간, 그리고 이쪽과 저쪽, 혹은 경계를 오고 가던 과학적 논증과 사유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졌다. 저자는 분자생물학 전공자 임에도 인문학적 책 읽기에 편식이 없었고, 그 결과로 교양 과학 철학서를 우리 앞에 내어놓았다. 그간 이런 스타일의 책을 국내서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는데 추천사를 쓰신 홍성욱 교수님 말씀처럼 뉴페이스로 등장했다. 책을 낸다는 일이 여느 때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수고로움과 뿌듯함을 아는 독자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 성의껏, 열심히 읽었고, 때로는 문장을 읽고 나서 이렇게 재배열해 본다면, 혹은 이 단어는 이 문장을 표현하는데 적절한지, 대체하면 더 좋을 용어도 떠올려 보며 읽었다. 이 부분들은 저자에게 학생이 질문하듯 천진하게 질문을 해볼 생각이다. 이상한 질문이라도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시길
그럼에도 이 책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새겨둔 부분이 있다면 불균형 속에서의 균형 혹은 평형을 찾아가는 생명의 신비, 생명현상의 비밀이 담긴 암호로 DNA에 인격을 부여하면서 20세기 인류의 많은 부분을 그 자체가 생명의 본성으로 여겨지게 된 과정, 20세기 유전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생물학이 현재 과학영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관심과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환원주의적 시각이 여전히 우리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려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생명은 존재,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려준다. 마치 행복이 어떠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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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호기심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언급되는 책들이 궁금해져서 온라인 서점에서 장바구니에 담기도 하고, 평소 잘 몰랐던 사실을 우연히 책을 통해 발견하는 일은 누군가가 책을 추천해주어 보는 것보다 다소 능동적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중고등학교 이후 아주 살짝 언급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의 그 이상을 알게 된 부분들도 있고, 여전히 비판적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은 의심의 눈초리는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대한 태도도 잠시 배우게 된다. 비록 내 전공 분야가 아니었음에도 생명에 관한 일은 우리 모두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 아닌가. 적어도 내게는 이 책으로 인해 책장에 꽂힌 멀게만 느껴지던 과학서를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