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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여자님의 서재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 17,550원 (10%970)
  • 2023-09-06
  • : 76,58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리뷰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야기가 슬퍼도, 비참해도, 허무맹랑해도 아무 상관없다. 아주 맑은 쨍한 겨울의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것처럼 좋은 이야기는 가슴을 상쾌하게 한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정답게 느껴지고, 지겹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일상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좋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참 재미있었다. 처음엔 그 묵직한 두께감에 살짝 두려웠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엔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소설 속 도시의 벽처럼 모든 게 우리 마음대로 달라지나 보다. <난생 처음 봄날 들판에 나온 어린 토끼처럼> 우리의 마음은 생각이나 의지보다 힘이 세고 제멋대로지만 또한 그래서 재미있고 유쾌한 일상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시종일관 기묘하고 미스터리한 하루키의 토끼를 따라다니며 불확실하고 신비한 현실 세계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수 있었다. 놀이동산의 놀이기구가 주는 싱거운 스릴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 속에서 미스터리를 발견하는 기쁨.


 하루키의 이 소설을 읽으며 필립 라킨의 <나날들> 중 ‘Where can we live but days?’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린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 현재의 이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현재만 온전히 살고 있는 것일까. 잠결에 뒤척이며 파도가 철썩이는 절벽 위에 서있는 꿈을 꾸고,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기울이는 술 한 잔에 첫사랑을 되새기고, 지루한 수업 중에 전학 간 친구와 먹은 떡볶이를 추억한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여러 현실과 나란히 그 시간 위를 걸어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진짜인자 가짜인지 모호한 현실들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위안도 얻으며 삶에 분투한다. 단순하고 정확하게 분류되고 정의된 세상의 질서와 규칙 속에서 -<무엇이 기묘하고 무엇이 기묘하지 않은지, 판단의 축이 내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루키가 그려내는 세상 속 사람들은 내게 따듯한 위안과 위로를 주며 다독인다.


 하루키는 소설 속 많은 사물들과 현상 또는 사람이 아닌 생명체, 이를테면 꽃, 새 등에 마법을 걸어 놓은 것 같다. 동화 <미녀와 야수>에는 마법에 걸린 하인과 동물들이 변한 옷장, 컵, 발판, 시계, 찻주전자 등이 등장한다. 소설 속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과 아름다운 자연현상들을 묘사한 글을 읽다 보면 당장이라도 동화처럼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너의 빨간색 샌들과 나의 흰색 스니커즈가 모래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작은 동물들처럼.>- 이 문장을 읽은 후 빨간색 샌들과 흰색 스니커즈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루키의 주문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물들을 통해 각성한다. - <어느 날 문득 눈이 번쩍 뜨인다. 그 각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극히 사소하고 흔하디 흔한 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를테면 막 삶은 달걀의 냄새라든가, 귀에 와 닿은 추억의 음악 몇 소절이라든가, 방금 다림질한 셔츠의 감촉이라든가…그것이 의식의 특별한 부위 어딘가를 자극해 흠칫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종종 생각을 한다.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라지고 난 후 무엇으로 기억될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경험들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아마도 많은 경우 사물로 기억되고 사물로 기억을 건져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물은 사람이 아닌 생명체를 포함) 대부분 사람의 이야기는 사물의 이야기다. 사물은 우리가 사라진 것들을 그리운 것들을 지켜내고 불러내는 주문이며 통로이다. 반복하는 루틴 속 사물들은 끊임없는 되풀이 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반복하는 주체의 <기척>을 몸 속 깊숙이 받아들인다.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사물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정말로 매혹적이다.

 ‘우리는 사물로 기억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하루키는 내내 말하고 있다. 이 모호하고 불명확한 세상에서 사물처럼 우리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소설 속 사물들은 우리가 진짜라고 부르는 현실에 우리를 단단히 묶어 두기도 하지만 -<문득- 마치 발 밑의 풀숲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가볍게 그 현실 위로 ‘둥실’ 떠오르게도 한다.

 -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 온실 옆 크게 붐비지 않는 카페, 커피와 사과 타르트, 하얀 거즈처럼 부드러운 소재에 귀퉁이에 은방울꽃 자수가 작게 들어가 있는 손수건, 터쿼이즈 블루 잉크, 하얀 파우더가 뿌려진 사과 과자, 고야스 씨의 베레모, 정사각형 방과 검은색 구식 장작 난로, 빨간색 유아용 자전거, 기다란 대파 두 뿌리, 블루베리 머핀, 회색 더플코트> - 소설 속 이 사물들은 강렬한 인상으로 오래도록 나의 이야기 속 사물들의 기억과 함께 보존될 것이다. 메리 포핀스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 우산이 필요하듯 – 우산을 휙 펴더니 머리 위로 펼쳐들었다. 발가락을 정원 길을 스치게 번쩍 들어올려 대문 너머 벚나무 길로 띄워 보내고 벚나무 가지보다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에게도 또 다른 현실을 불러내기 위한 각자에게 어울리는 사물이 필요하다.

 -문지기가 해 넘어가기 직전 뿔피리를 불면 황금빛 털을 가진 동물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태곳적 기억을 향해 고개를 든다- 

나에게 하루키의 이 작품은 문지기가 부는 뿔피리다. 소설을 읽는 내내 시간이 멈추고 오래 전 기억이 소환되고 사라져간 존재들이 부활했다. 소설 속 사물들은 내 이야기 속 사물들을 상기시켰다.


 정말 따라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이야기였다. 따라하고 싶다는 것은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잉크로 편지도 써보고 싶고, 이름 없는 커피숍에서 블루베리 머핀도 맛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고요한 눈길도 걸어보고 싶고, 고야스 씨처럼 맛있게 홍차를 타보고도 싶었다. 

-<고야스 씨는 커피를 즐기지 않는 모양이라 늘 홍차만 마셨다. 관장실 캐비닛에는 그의 전용인 흰색 도기 찻주전자와 특별히 블렌딩한 찻잎이 갖춰져 있었다. 그는 전열기로 물을 끓이고 세상 제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주의깊게 홍차를 우렸다. 그김에 나도 나눠 마셨는데, 색도 그렇고 향도 그렇고 감격스러울 정도로 맛있는 홍차였다. 나는 커피파였지만 그가 우려주는 홍차를 맛보는 일은 곧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되었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모두 개성과 취향이 뚜렷하며 그들의 개성은 반복되는 습관과 일상의 패턴으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마음, 그림자를 바라보는 다정한 마음에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제각각의 모든 꿈은 세계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타인의 <‘오래된 꿈’>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에 가슴도 뜨거워졌다. 눈에 일부러 상처를 내야 보이는 타인의 소망과 좌절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존중과 그 무엇보다 설레고 가슴 뛰는 사랑에 대한 기억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에 싸이고 미스터리한 존재들이다. 인물들을 미스터리하고 모호하게 그린다는 것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잘 모르면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까. 

비밀과 미스터리는 아무런 정답이 없는 이 세계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에밀리 디킨슨 -모든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비스듬히 말하라-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이 소설은 에밀리의 말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인생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 속에서 비스듬하게 천천히 찾아가고 있다.


<~> : 소설 속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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