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세계로 들어가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입구, 그 의미를 따질 필요도 없는 당연한 입구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다른 당연함에 대해 자신의연함을 주장할 필요가 없는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모든 소속은 자신의 자명함을 다른 자명함에 대해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의미를 물어야 하는 당연함은 더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문화에서 외부의관점은 내부 관점의 부분이 된다. 언제나 다른 것이 될수도 있는 외부의 관점. 이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다른 것을 믿을 수도 있으며 다르게 살 수도 있는 외부의관점을 말한다. 이 외부의 관점이 오늘날 모든 정체성, 모든 문화의 필수 부분이다. 외부의 관점은 이제 내부의 관점의 부분이 되었다.
다원화를 위한, 혹은 다원화를 방지하는 만병통치약이 있다는 생각도 이런 주술에 속한다. 주도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 그보다 훨씬 많이 쓰이고 있는, 만병을 다스리는 마술 모자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토끼는 ‘우리‘의 가치다. 원래는 교육이 만병통치약의 가장 앞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가치가 있다. 가치 논의들은 대체로 이 ‘우리‘의 가치가 고정된 목록이자 확정된 규범이지, 언제나 새롭게 협의하고 협상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로 정확히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핵심 가치인 협상 가능성 자체를 은폐한다.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 ‘문화’를 변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호종으로 지정하거나 차단막을 세울 수는 없이다.
다. 문화는 오로지 그 문화의 내용과 대상으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도 구성되기 때문그러므로 ‘통합’으로는 규정되기에는 불충분한 변화는 훨씬 일찍, 내용이 수용되기 훨씬 전에 시작된다. 그내용이 현재 늘 충돌을 일으키는 여성 해방, 인권, 동성애라도 마찬가지다. ‘통합‘은 내용 차원에서 발생하지 않는하나의 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합은 이민 문제에만 적용되지도 않는다. 만약 세계화와 이민이사람들을 탈영토화하고, 국경에 따른 정착과 물려받은 정체성을 해체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다원화는 모든 것을 탈영토화한다. 물리적으로 이동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두를.
이렇게 볼 때 다원화는 타자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원화는 우리도 변화시킨다. 다원화는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도 바꾸며, 나아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바꾼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내밀하고 깊은 변화일 것이다. 다원화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 즉 자기 자신과맺는 관계 방식도 바꾼다.
한편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는 소수자의 전형적인경험이었다. 소수자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소수자는 어떻게 주류 사회에 대응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를 언제나 자문해야 했다. 그러므로소수자의 기존 경험이 이제는 사회의 기본 경험이 되었다. 심리 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은 주류 사회도 소수자사회처럼 기능한다.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 다양성과 다원성 곁에 서야 한다. 다양성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우리 내면으로, 우리 자신의 전체 정체성에 진입했다.
그러므로 다원화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작은 자아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아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우리가 아니며, 의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우리는 오늘날 어쩔 수 없이 외부의 관점을 내면의 관점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내면의관점이다. 우리는 당연함이 축소된 자아다. 우리는 정체성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Precario와 노동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저임금, 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계급을 가리킨다.)로 살아간다. 프레카리아트처럼 안정되고 고정된 관계에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더 작은 자아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원화된 개인주의가 낳은 모순된 결과다.
동의한 교실에 무슬림 학생 옆에 유대인 학생과 무신론자 학생이 앉아 있고, 이민자 학생 옆에 비이민자 독일 학생이 앉아 있다면,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변한다. 혼종 정체성 같은 혼합된 형태가 필연적으로 나타나서가 아니라, 혼합보다 더 근본적으로 기존의 정체성이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