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은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법에 저촉되는 일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의 앞에서 절대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돌이키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죄라서가 아니라 동기가 악할 때에도 죄인 것을 인정하는 일, 선한 행동 이면에도 자기 중심성의 또아리를 발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견되면서 나라는 존재의 부패성에 대해서 처절하게 느끼는 과정이 있다. 이런 죄책감은 자칫 자기 학대와 비하로 내닫기 쉬운 것이 어쩌면 신앙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울증은 비기독교인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더 심하게 발현된다는 얘길 듣곤 했다.
나는 간혹 우울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우울증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고 그저 피상적인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요의 <나는 내가 왜 사는 지 몰랐습니다>라는 책을 읽고서 우울증이 그저 마음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울은 단지 증상일 뿐이 아니라 병이라고 칭할 수 있는 생리적 이상 현상에 의한 것임을, 아무리 의지로 우울을 이겨보려고 해도 불가항력적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의지가 있을지라도 걷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간 교회 안에서 조언이라고 회자되었던 것들, 예를 들어 마음 먹기에 따른 문제이지 더 기도를 열심히 해라, 믿음의 의지를 더욱 사용해 보아라, 항상 기뻐라하라, 감사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붙잡아 보아라 등의 섣부른 말들이 실제 우울증(또는 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는 도리어 이런 조언을 한다.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가 어려운 곳이라면 굳이 힘들게 기도하지 말라.....능력 밖의 모든 노력은 당신을 방해하고, 의무를 걱정거리로 만들며, 당신의 상황을 악화시켜, 당신을 무력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배 속이 불편할 때는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음식을 많이 먹어서는 안되고 잘 소화시켜야 한다. 소화가 잘되지 않을 때는 먹는 양을 줄여야 하듯이 묵상과 개인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138P)"
"문맹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고, 감옥에 있거나 병든 사람은 말씀의 선포 없이도, 혹은 성도의 교제가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울증으로 능력이 감퇴한 사람은 공식적이고 긴 시간이 필요한 기도와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닌 간단한 묵상과 짧은 기도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139p)"라고,
그간 교회 공동체에서 너무 쉽게 회자되던 조언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지침이다.
이는 단지 기도를 줄여하라는 의식적 규율의 제한ㅇ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다면, 완쾌될 때까지는 걷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부분이 바로 당신의 사고 능력 혹은 상상력이다(136p)"
벡스터의 진단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것을 먼저 온전케 하는 것 이전의 종교적 행위는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또한 이렇게도 지침하고 있다.
"몸이 치료되지 않는 한 마음의 치료는 요원하므로 아무리 명쾌하고 논리 정연한 중고라고 해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161p)"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영혼의 상태가 개인의 선택과 통제를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리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일수록, 죄와 거리가 멀고 위험도도 낮은 상태라는 것이다(179p)"
위와 같은 언급들을 하며 실제로 약물치료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17세기의 청교도 목사가 우울증에 대하여 이렇듯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영혼의 밤을 지날 때>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앙적 위인들이 얼마나 깊은 우울증으로 시달렸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성과나 업적 이면에는 우울이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하여 어떤 이는 자살에 이르기도 하였다. 15세기 종교개혁가 루터 또한 우울병을 앓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삶의 쓸모없음을 탄식하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죄인 괴수에게 베푸시는 은혜>에서 읽은 존 번연의 글에서도 깊은 우울이 읽히곤 했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 한 오라기의 실낱같은 죄라도 자기 영혼에 붙어있지 않기를 씨름하면서, 때론 마귀의 참소와 치열하게 싸우고 환영과 환청을 들으면서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에피소드 들을 읽었다. 그러나 항상 베푸시는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는 번연을 그 책에서 자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자기 내부의 진단과 조명으로 자칫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빛을 미처 간과하고 우울감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과 성취를 타인과 비교경쟁하여 재단하는 것을 옳다 하지 않듯이, 죄 또한 타인과의 비교로 더 나쁜 죄, 덜 나쁜 죄롤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 존전 앞에서 그 빛 앞에서 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본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죄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본래의 모습에서 떨어진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신체적이든 지적이든 그것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그것은 지나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시민법, 교회법, 가족법 등의 목적이 각 영역을 발전시키고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듯이 개인에 대한 규율은 사람에게 해로움이 아닌 유익을 끼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종교를 핑계 삼아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된다(170p)"
빛 앞에서의 죄에 대한 통절함은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여 죄임임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음을 기억하고 재확인하는 일이다.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한 자신의 모습을 인식했을 때, 그곳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 할 것이다. 이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생각은 저의 자기에 관한 것으로 한정된다(121p)"
벡스터의 이 진단은 매우 주효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을 자꾸 바깥 세계로 이끌어주고, 그들을 홀로 두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은 매우 필요한 조언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