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400년>은 왜 필요했을까?
이 질문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를 살피고자 함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밝힌다.
“신구약 중간 시대를 거치면서 예수님을 보내실 조건이 제대로 무르익은 것이다”‘(242p)
이에 대한 사실로 저자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성전 대신 회당이 들어섰고, 회당은 복음을 전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는 것, 주전 250년경에 모세오경을 시작으로 100여 년에 걸쳐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래서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팍스 로마나, 곧 평화의 시대를 열면서 복음이 전하는데, 도로가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고 언어가 통일되었다는 실례를 제시한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는 결국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실질적으로 예비하는 시간이었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한 예정된 시간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를 통해서 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때에 대하여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한편 중간기의 역사를 앎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의 1차 청자, 또는 독자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받았을 충격이 가늠이 된다. 마카비 혁명의 주동자랄 수 있는 맛다디아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안식일에 쳐들어온 적군에게 일말의 대응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시리아 군대가 부러 유대인의 안식일 율법을 알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 없는 우리를 죽었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라”라고(117p) 하면서 당시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안식일과 목숨을 맞바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에서 곡식을 따 먹는 행동들을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충분히 반 율법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예수님은 왜 그리고 급진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실 만큼 힐난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악의 근원지라고 할 만큼 비 호감 집단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무리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그 정체성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던 이들의 신실함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발견하게 되면, 과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통해서, 본질과 진실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이 책이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등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해버렸던 문자들에 대하여 다시금 재고할 의지를 갖게 한다. 그러면 수십 번 읽었던 성경의 말씀이라도 마치 새롭게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빌립보서, 빌립보 지방에서 일어났던 패권싸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격전을 벌인 빌립보 지방, 이곳에는 승자인 옥타비아누스가 패자인 안토니우스 휘하 장병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을 로마시민과 똑같이 대우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군사 용어가 많이 나온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읽는 빌립보서와 빌립보서가 쓰여질 당시의 독자가 읽을 때의 빌립보서는 상당히 다른 어감과 어조를 들릴 것이 자명할 것 같다. 저자가 빌립보서의 말씀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준 것처럼 말이다. ‘한마음으로 서서’(빌1:27 일부)에서 ‘서서’는 군인들이 다가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굳건하게 서 있는 자세를 연상시키는 말(165p)이라고 한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각성 상태로 지낼 것을 호소하는 언어이다. 지금처럼 편안하고 일정한 안전한 보장된 상태에서 빌립보서의 저 말씀을 읽자면, 전혀 건져낼 수 없는 행간의 의미이겠다.
하여 저자가 밝혀준 잃어버린 400년의 역사, 말라기와 마가복음(마태복음보다 먼저 기록됨)의 중간기의 역사를 알고 염두해 둔다는 것은 성경을 새롭게 읽는 길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