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자주 하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기존의 제도권 교육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늘 그렇듯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에서 나오는 말이다. 나의 경우 경상도의 보수적인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서열이 있었고, 야간 '자율' 학습을 밤 10~11시까지 강제로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많이 포기하고 참아야 했다. 시작부터 얘기가 푸념 글로 흐르는 것 같아 급하게 정리를 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지난 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는 잘하지 않게 됐다. 아무리 후회해봤자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가 없고, 엎질러진 물 앞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과거를 교훈 삼아 앞으로의 선택을 잘 내리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창가의 토토>의 주인공 토토는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1년도 안 돼 퇴학당한 학생이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토토는 현대에선 전형적인 ADHD로 판정받을 아이다. 수업시간에 전혀 집중을 못하고, 어떨 때는 창가에 앉아 바깥만 쳐다보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토토는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해 도모에 학교로 옮겨야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입학한 초등학교를 1년도 안 돼서 쫓겨난 '문제아'의 이야기가 되는 걸까?
하지만 다행히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이 책은 퇴학당한 '문제아'의 이야기도, 산만하고 말 많은 꼬마 아이가 어느 특별하고 열정적인 선생에 의해 '교정'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토토가 '토토다움'을 유지하면서 잘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도모에 초등학교의 교장 고바야시 선생님은 전학 첫날 토토의 이야기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들어준다.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그리고 각각의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보듬어주려 한다. 도모에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최대한 자유로운 환경에서 스스로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고 절대 아이들을 방임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해진 한 길로 아이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함께 찾아주는 것이다.
이 책의 토토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고, 주인공인 꼬마 아이는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때로는 어른들의 눈에 돌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자신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끼치는 어른(고바야시 선생님, 포르투가)을 만나게 되고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창가의 토토>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전개는 완전히 다르다. 제제는 자신을 둘러싼 가혹한 환경에 의해 너무 일찍 철이 들고, 우울해져야 했다. 하지만 토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순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토토의 어머니는 토토가 예상 밖의 행동이나 말을 해도 최대한 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딸을 배려해줬다. 고바야시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이 책 또한 갑작스러운 안녕을 맞게 된다. 이야기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본이기 때문이다. 토토는 자신의 친한 친구, 자신의 애완견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고 도모에 학교는 폭격으로 불에 타고 토토의 가족은 피난 열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하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은 학교가 불에 타는 걸 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지 생각하고, 토토는 교장선생님이 자신에게 늘 하던 말 "너는 사실은 참 착한 아이야."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어린 토토의 관점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중간중간 이제 성인이 된 작가의 생각이 들어가기도 한다. 도모에 학교는 그 흔적도, 기록도 거의 남지 않고 사라졌지만 작가가 책을 통해 기억해냄으로써 모두에게 알려지고 기억되게 됐다. 작가는 그를 통해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자신의 학교와 유년기를 추억하고, 미처 준비도 못하고 헤어진 것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을 고하고 싶었을 것 같다. 책이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쓰이게 된 것은, 작가 본인조차도 유년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