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sskimg2님의 서재
  •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 14,400원 (10%800)
  • 2019-06-14
  • : 24,594
아래 글은 기후변화위기와 관련한 나의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최근 나이 일흔의 생태학자가 쓴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나서, 그동안 적어두었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리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

기후변화, 인류가 저지른 파괴에 대한 대자연의 응징
- 그런데 인간은 똑똑한가? 미련한가? -


이 글은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며 떠오른 자연 생태계와 관련한 생각들로부터 시작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Where the Crawdads Sing》(김선형 번역, 살림 발행, 2019)이다. 인터넷 책방에서 우연히 접한 책의 제목에 이끌려 소개 글을 읽어본 다음 주문을 했다.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동물 생태학자인 델리아 오언스 Delia Owens가 나이 일흔이 되어 쓴 최초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뒷부분에 실려 있는 ‘작가와의 인터뷰’를 보면, 책의 제목과 작가의 직업에서 예상해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을 살인 미스터리이면서 법정 드라마 같기도 하고 인간 본성의 탐구이기도 한 로맨스 소설로 구분하고 있었다. 뭐지? 외딴 숲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어떤 비극적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해변의 습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토리에 점점 빠져들면서도, 읽기 전부터 생긴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자신의 직업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뭔가 전하고 싶은 것을 논픽션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쓴 것 같은데,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학자로서 평생 살아온 작가에게 어떤 절박하거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혹은 작가에게 이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특별한 과거가 있었을까? 아니면 학자로서 주로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동물들을 마주하며 살아온 23년의 삶을 되돌아보며 문득 뭇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워졌던 것일까?

<그림 1> ‘가재가 노래하는 곳’ 책 표지


1, 작가가 밝힌 모티프motif와 내가 작가였다면 말했을 모티프

줄거리는 이렇다. 소설 속 주인공은 ‘카야’라는 이름의 여자이다. 카야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대서양을 접한 습지의 외딴 오두막에 사는 한 불우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다. 베트남 전에서 부상으로 퇴역한 뒤 술에 의지해서 사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형제자매는 물론 어머니까지 모두 집을 떠나고, 어느 날부터 아버지마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학교를 가지 못해 글도 읽지 못 하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사는 카야에게 ‘테이트’라는 고등학생이 나타난다. 케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책을 함께 읽는다. 홍합 등 어패류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면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카야는 수집한 조개껍데기, 습지에 사는 곤충들, 새의 깃털 등으로 만든 표본들과 그것들을 세밀하게 직접 그린 그림들을 계속 늘려간다. 그러는 동안 카야와 테이트는 장래를 약속할 만큼 사랑이 커져간다.
그러다가 테이트는 큰 도시에 있는 주립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방학이 되면 당장 돌아오겠다던 그는 방학이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그 뒤로도 몇 년의 세월이 더 흐르는 동안, 그가 자신을 버렸다는 배신감과 외로움으로 힘겨워 하는 카야에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타운에 있는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쿼터백 출신으로 뭇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온 ‘체이스’이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고향에 남아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 일을 하고 있었고, 친구들과 술, 마을 처녀들과의 애정행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홀로 사는 카야를 우연히 발견하고 유혹한다. (작가는 체이스가 본능적인 우리 내면의 일부를 표상하고, 발정난 수사슴에 그를 비유했다.)
카야는 테이트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체이스의 유혹을 뿌리치지만, 집요하게 카야의 마음을 사려 하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결국 몸을 허락하고, 마침내 체이스와의 결혼까지 꿈꾸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체이스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또 한 번의 배신감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첫사랑이었던 테이트가 나타나 카야에게 용서를 구한다. 생태학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그동안 그녀가 모은 표본들과 그림들을 보고 놀라워 하며 그것들을 출판사에 보내 순서대로 책으로 내자고 제안하고, 마침내 출간된 책들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팔려나간다.
한편 체이스에게서 배신당한 뒤 약 2년이 흐른 어느 날, 체이스가 카야 앞에 나타나 그녀를 강간한다. 그리고 몇 주 뒤 체이스가 시체로 발견된다. 보안관은 그녀에게 혐의를 두고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기소하고, 검사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며 유죄를 입증하려 하지만 결국 무죄로 풀려난다. 그 뒤 카야는 계속해서 책을 발간하고, 테이트와 우정 어린 사랑을 이어가다 예순 여섯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장례를 마친 테이트는 카야가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녀가 남긴 소지품들을 정리하다가, 상자 안에서 살인을 암시하는 그녀의 시와 함께 체이스가 죽기 직전까지 목에 차고 있었던 조개 껍데기가 달린 목걸이를 발견한다. 테이트는 목걸이의 가죽 끈을 풀어 시가 적힌 종이와 함께 불 속에 던져버린다…

작가가 생태학자로 살아온 흔적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단연 돋보이는 가운데, 문명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채 어릴 때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고립된 삶 가운데서 만난 남자들로부터 버림받은 한 여성의 고독과 상처, 그러면서도 자연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그녀의 ‘첫 연인과의 순수한 사랑’과 ‘짐승처럼 자신을 탐했던 인간에 대한 응징’이 교차하는 스토리의 반전이 가히 충격이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책 막바지에 달린 작가의 후기, 그리고 역자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읽으면서 그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작가가 아프리카에서 남편 그리고 아들과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 기간 중에 밀렵꾼이 살해된 사건의 혐의자로 그녀의 아들이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자신의 아들과 관련된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실제로 범했을지도 모를-그러나 이미 무죄판결이 난- 살인을 악행에 대한 정의로운 단죄로 정당화하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쓴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차피 판결이 내려진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낼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과거라면 오히려 묻어버리고 싶은 게 인간 심리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평생을 바쳐 생태를 연구해 온 학자가 나이 칠십이 되어 최초로 쓴 그 소설 속 여주인공 ‘카야’가 다름 아닌 ‘대자연 mother nature’를 의인화한 것이라면, ‘바람둥이’ 체이스의 죽음이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인류에게 크고 의미 있는 화두와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스토리가 되지 않았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가라’고 자주 말씀하신 분은 어머니였어요(…) 이야기의 핵심주제 중 하나는 인간이 과거 수백만 년 동안 해온 그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작가는 스토리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우리는 상당부분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위협을 받거나 고립되거나 거부당하면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카야 안에는 제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도 카야가 많이 담겨 있지요. 카야는 태고의 본능에 근거한 우리의 일부를 표상합니다.”라고. 결국 카야는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 전체’를 의인화한 주인공이기보다는, 아쉽게도 ‘자연의 수많은 구성원 중 하나인 인간의 본성’만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의 아쉬움은 이런 것이다. 만약 작가가 카야를 ‘태고의 본능에 근거한 인간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속한 대자연’을 표상한다고 설명해주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테이트는 자연을 지키려 애쓰는 인간, 체이스는 그런 노력에 역행하는 사악한 인간의 모습인 ‘또 하나의 플롯plot’이 성립되고, 급기야 이 소설은 고립된 인간이 그러한 역경 속에서 본능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충격을 넘어, 자연의 일부인 인류가 그동안 자신들의 기원(起源)인 자연에게 끼친 엄청난 해악에 대해 대자연이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웅변하는 상징적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즉 평생을 생태학자로 살아온 작가에게 걸맞는, ‘무한(無限)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추구해온 인간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자연 파괴와, 이에 대해 추호의 자비도 없이 철저히 응징하는 자연’이라는 모티프와 메시지를 담아 ‘기후변화위기의 심각성과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재난에 대해 경고하는’ 역작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15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라는 기록을 넘어, 기후변화위기의 시대에 탄생한 불후(不朽)의 고전(古典)으로 남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평생을 생태학자로 살아온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의 모티프를 설정하면서 어떻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테이트가 살인의 결정적 증거인 목걸이에 달려 있던 조개껍데기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와서 떨어뜨린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다른 조개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 조개껍데기는 곧 사라졌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고, 파도가 발 위로 솟아올랐다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를 끌고 바다로 돌아갔다.’ 그렇게 ‘체이스 살인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끝났다. 달리 말하면 ‘완전범죄’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조개껍데기는 내게 ‘오만한 인간의 탐욕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그 조개껍데기가 모래사장에 숱하게 쌓인 조개껍질들 위에 버려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인류에 대해 어떠한 온정이나 용서없이,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응징하는 대자연의 차가운 암시였다.
이번 세기 내에 지구가 멸망할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지구가 2050년에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동영상 제목: [위대한 수업] 총, 균, 쇠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직강 2050년에 지구가 멸망하는 이유;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Onz6kNRlsIs ) 어쨌든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멸종한다면, 인류를 멸종시키는 주체는 자연(自然)이다. ‘자연의 일부였던 인류를 자연이 제거한다.’ 이것이 만약 내가 이 소설의 작가였다면 담았을 또 하나의 모티프였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라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구 상의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여겼다. 마음대로 자르고 뽑고 파헤치고 죽였다. 죄를 범하면 죄값을 치르는 게 당연한데, 만약 인간이 자연에게 가한 온갖 악행에 대해 자연이 응징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일 아닌가?


2. 그렇다면, 기후변화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초래했나?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올해 3월 20일 유엔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승인한 ‘2022년 제6차 평가 종합보고서(2022 RE100 Annual Disclosure Report)’가 나왔고, 이 보고서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화로 인해 지구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1.1도 상승했으며,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2030년대 전반기까지 1.5도 상승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 당시 ‘2100년 말’로 내다봤던 1.5도 도달 시점이 급격히 앞당겨져 지금부터 불과 10년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림 2> 2022 RE100 Annual Disclosure Report 표지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은 '지구 온도 ‘1.5도 상승 20년도 안 남았다는 경고 새겨야’ 제하의 3월 20일자 사설에서, 지구 온도 1.5도 상승은 폭염과 혹한, 태풍, 가뭄 등 기상이변이 폭증하는 임계점이고, ‘기후 시한폭탄’을 해체하기 위한 인류의 탄소감축이 더욱 시급해졌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다시 증가하고 있고, 게다가 강릉과 삼척에 새 화력발전소가 가동을 준비 중이고,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태양열·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기존 30%에서 21%로 축소되었다고 언급하면서 정부는 물론 기업과 시민 모두가 탄소 감축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해당 사설 링크:
https://m.khan.co.kr/opinion/editorial/article/202303202200005?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결국 이러한 사실은 인류가 다가오는 기후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소하려는 실천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고, 한국은 한술 더 떠서 오히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약속했던 이행 항목들을 실천하기는 커녕 화력발전소를 새로 짓는 등 세계 모든 나라들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실천에 역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급조된 선진국’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국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를 ‘제6차 평가 종합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RE100 이행 비율이다. RE100은 Renewable electricity 100%, 즉 재생에너지 전기 100%의 약자로 기업활동에 필요한 전력의 100%를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된 전기로 사용하겠다는 자발적인 글로벌 캠페인이고,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Carbon Disclosure Project)와 파트너십을 맺은 다국적 비영리기구인 ‘더 클라이밋 그룹(The Climate Group) 주도로 2014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출처: 재단법인 그린피스 홈페이지 링크: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21347/blog-ce-why-re100-is-important/)
이 보고서에 따르면, RE100 캠페인에 가입한 기업 수는 총 355개이고 이 가운데 한국 기업 수는 15개이며, 참여기업들이 목표하는 RE100달성년도는 2031년이다. 해당 보고서는 회원으로 참여한 기업들이 어떻게 얼마나 RE100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을 집계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바로 한국기업들의 총 전기 사용량 대비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2%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참여국가를 기준으로 총 189개 국가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 얼마나 낯뜨거운 사실인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파렴치할 수 있을까? 이에 비해 모나코,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크로아티아, 아일랜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체코 등 다수의 유럽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벌써 90%를 넘었고, 미국이 60%대, 러시아, 멕시코가 50%대, 중국이 32%, 일본이 15%를 기록했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도 한국보다 모두 높았다. 또한 355개 회원 기업 가운데 14개 기업이 RE100 달성 목표연도를 12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9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자료 출처: (사)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홈페이지: https://kosif.org/kosif5/?vid=62 )
또한 최근 보도를 보면, 애플, 구글은 이미 2019년부터 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 전기로 대체하는 목표를 달성했고,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을 조기에 달성을 위해 모범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삼성전자의 글로벌 전 사업장 기준 RE100 달성율은 20.48%, 네이버는 국내 일부 사업장 기준으로 0.64%에 그치고 있다.
(출처: SBS BIZ: https://biz.sbs.co.kr/article/20000110197 ). 너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것 아닌가? 말로는 뭐든지 할 것처럼 약속해 놓고, 실천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동남아 국가보다도 지지부진하다. 부끄럽다.

<그림 3> 한국기업의 RE100 실천 현황 (‘2022 RE100 Annual Disclosure Report’ P.33)

한편, ‘초록별(Green Planet)’ 지구를 소중히 여기자는 ‘지구의 날’ 행사가 지난 4월22일 국내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날을 전후하여 국내 여러 대기업들이 주관하는 행사가 있었고, 어느 기업은 ‘지구를 위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동(소·확·행)’을 주제로 22일 저녁 8시부터 10분간 집 안 소등, 주 1일 3끼 채식, 텀블러 사용 등의 참여를 유도하는 이벤트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링크: http://www.esg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9 ) 그러나 이러한 이벤트가 참여 기업들의 지속적인 활동의 하나라고 확신하기 어렵다. 부디 전시성, 일과성 행사이 아니길 바라지만, 위에서 살펴본 보고서에서 드러난 RE100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기업들의 이행율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이벤트의 진정성을 기사에 실린 그대로 수긍하기는 쉽지 않았다.


3.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가?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최근에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느 학자는 유튜브에서 “이 세상은 이제 ‘챗gpt’를 할 줄 아는 사람과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라고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는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 가족의 주치의가 만성 변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세상은 똥 잘 싸는 사람과 잘 못 싸는 사람을 나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그 주치의의 말을 떠올리면서 말한다. “이 세상은 섹스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한편 목사나 신부들은 매일 기도를 하는 신자와 하지 않는 신자로, 또는 성경을 매일 읽는 신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구분의 공통점이 느껴진다. 자신의 직업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나 관심이 큰 분야에 대해 나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집단을 대별하는 것이다.
기후변화위기와 관련해서도, 이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둔감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로 대별한다면,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기업들의 RE100 목표 이행 수준이 어는 정도인지는 앞에서 보았다. ‘기업’이 그렇다는 것은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떠한 지 나부터 생각해 보자는 거다. 우리가 하루 동안 활동하면서 먹고 마시고 쓰는 모든 것들 가운데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자. ‘나는 얼마나 에너지를 아끼고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기업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책과 행정을 펴지 않고, 개인은 개인대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또한 정부-기업-개인, 3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계획한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세계 모든 국가가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이 지구 상의 어느 개인도, 어느 기업도, 어느 국가도 예외가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후변화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있어서 나타나는 실행의 차이는 바로 문제에 대한 인식consciousness의 차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 그 문제가 장차 야기할 결과에 대한 인식, 미래의 환경, 자연 및 생태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인식,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나는, 기업은, 사회는, 국가는, 국제 사회는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인식 없이는 문제해결을 위한 어떤 행동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서 작가가 카야를 대자연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은 데 대해 크게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작가는 평생 생태를 연구하며 살아온 학자가 아니었는가? 그가 산업화 이전에, 지금 우리가 겪기 시작한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는 앞에서 언급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인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자신의 작은 아버지의 하천해운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열심히 일한 노고와 능력을 인정받아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CEO가 된다. 소설 속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말부터 1930년대로 카리브해에 인접한 중남미의 콜롬비아를 무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하천을 오가며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이 배들이 모두 나무를 태워 동력을 얻었고, 그로 인해 하천을 따라 두텁게 자리했던 나무 숲들이 모조리 베어져 버렸다고 묘사하면서 그 당시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이 쓰여진 때는 1980년대말로, 여전히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산업화시대의 사고의 틀에 갇혀 있던 시대였고,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고 보면, 그나마 숲이 베어져 황폐화된 하천 변의 모습을 나름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 속에 묘사한 것만으로도 작가로서의 남다른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또한 작가가 그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변의 숲들이 모두 벌목되어 사라진 것과, 콜레라의 창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참상을 묘사하면서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이 읽혀지기 시작한 때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 인류가 최근 3년에 걸쳐 겪은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출현이 산업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연관되어 있고, 또한 지구온도가 계속 상승하고 이로 인해 동토층 속에 묻혀 있던 바이러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바이러스로 인한 신종 전염병이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라는 학자들의 경고를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바로 실천이다. 아무리 당면한 문제에 대해 ‘인식’을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들면,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것이다. 경제규모 세계 1위의 미국은 또한 산업화 이후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로 인해 발생한 지구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기후협약에서 탈퇴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파렴치한 행위였던가!
그렇다면 인간이 행동을 수반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인류가 당면한 기후변화위기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인식한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게끔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바로 양심에 뿌리를 둔 윤리의식, 책임의식이다.
기업도 기업에게 요구되는 기업윤리가 있다. 윤리의식이 희박하고, 책임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염치가 없는 개인-기업-정부가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한, 기후변화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는 요원하다. 그런데 양심적이든 이기적이든 무관하게 뭔가 암울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오죽하면 젊은 세대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를 낳지 않으려 하겠는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차원에서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연령과 무관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 기업과 정부에 묻고 싶다. 우리에게 닥친 기후변화위기를 극복하는데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얼마나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위기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거나 노력하려고 하는지 말이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한국경제신문의 뉴욕특파원이 한 글로벌 기업의 소식을 전했다.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_4XBwLZkg0 ) 다름아닌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 격인 루이비통LouisVuitton의 CEO가 일론 머스크를 제치고 세계 1위의 부호로 등극했다고 하면서, 뉴욕 맨하튼에 위치한 루이비통 계열의 귀금속 명품브랜드인 티파니Tiffany&Co의 매장 건물을 보여주었다. 매장은 건물내 11개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마다 주제별로 보석들을 판매하는데 내부 개보수를 하는데 들어간 비용만 3억 달러, 한화로 대략 4천억 원이 들어갔다고 했다. 또한 이곳 매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매장에서 판매되는 보석류의 가격이 몇 십만 원부터 몇 십억 원까지 다양하다고 하면서 매장 가운데 몇 개 층을 돌며 내부와 제품들을 보여주었다. 동영상을 보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다음과 같이 댓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담당 특파원이 간단한 답글을 올렸다.

<그림 4> LVMH 관련 동영상에 올린 질문과 답변
내친김에 RE100 Climate Group의 홈페이지에 있는 참여기업 명단에서 LVMH를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LVMH는 참여기업 명단에 없었다.
(링크: https://www.there100.org/re100-members )
LVMH와 그 CEO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재생에너지로 100% 전환하겠다는 RE100 프로젝트에 LVMH가 가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참고로 명단을 살펴보다 보니 영국 국적의 경쟁 브랜드인 ‘샤넬Chanel’은 2020년부터 회원으로 올라 있고 2025년에 RE100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RE100은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 특정 국가에서 제품을 판매하고자 할 때 해당국가에서 제시하는 요구조건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RE100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은 판매에 있어서 큰 장벽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발목을 붙들어 매는 꼴이 되는 것이다. 세계 1위의 부자로 등극한 루이비통의 CEO인 그가 기후변화위기에 대한 시대적 사명감은 접어두고라도, 그 명예를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스스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들이 앞으로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게 된다고 보면, LVMH는 시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역설적이게도 ‘프로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인류가 멸망하는 날, 폐허 속에서 그가 소유한 기업들이 만드는 최고급 브랜드의 옷과 장신구들로 온몸을 두른 채 보석더미 위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떠올렸다. 인간 사고(思考)의 한계가 상상하지 못한 재앙을 불러온다.

이제 ‘비이커 속의 개구리’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익히 들어본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삶아진 개구리 증후군 Boiling Frog Syndrome)’에 관한 이야기는 찬물이 든 비이커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한 실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 5>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출처: Getty Image: 링크: https://excelmindsjobs.com/boiling-frog-syndrome-are-you-in-or-out-lets-evaluate/ )
개구리는 비이커 안의 점점 따뜻해지는 물 속에서 유영을 즐긴다. 그런데 물이 계속 가열되자 개구리는 위험을 느끼고 비이커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해보지만, 데워진 물 속에서 이미 기운이 빠진 개구리는 도약할 힘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삶아져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기후변화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과 비이커 속의 개구리 중에 누가 더 미련한지 생각해보자. 누가 더 미련한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구리는 동물적 본능과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 외에는 특별히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과, 다가올 위기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할 방법을 도출해 내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구온도가 1.5도 상승하면 인간이 가진 어떠한 능력과 기술로도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며, 그 시점이 점점 당겨져서 빠르면 10년 내에 1.5도를 넘어설 위험이 커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1.5도를 지나 2도를 넘게 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 종의 절반이 멸종하며 그러한 재앙은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의 종들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이런 위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적인 인간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가열되는 물 속의 개구리가 보인 행동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개구리처럼 따뜻한 물 속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다. 어제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소비하고 사용하고 버리고 있는 것이다. 스티로폼과 비닐, 플라스틱 쓰레기를 양산하는 배달 음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켜 먹는다. 기후변화위기에 대한 경고들을 마치 “늑대야!”를 외친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이래서야 “인간은 개구리보다 더 미련하지 않다. 그런 비유는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기후위기가 현실로 닥칠 것이라는 경고를 들으면서도 위기의식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비이커 속의 개구리가 될 가능성을 인간 스스로가 높이고 있지 않는가? 인간의 이러한 아둔한 행태가 지구의 종말, 인류의 멸종에 대한 경고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될 거라는 확실한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2백만 년 전,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로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야 1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그때부터 ‘농경을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사유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이 생기고,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도시국가가 만들어지고, 세금을 거두고, 군대가 만들어지고, 질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베어졌고, 그로 인해 지금의 이라크 자그로스 산맥을 뒤덮었던 숲이 모두 사라지면서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에 엄청난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강 하구의 비옥한 땅에 위치했던 최초의 도식국가들은 번번히 침수되었고 마침내 사라졌다. 이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강의 상류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그 역사의 산물을 문명이라 부르고, 이러한 문명사회는 급기야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 경제가 급팽창했고, 산업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류는 오직 성장과 부를 추구하다 문명이 시작된 지 불과 1만5천 년 만에 멸종의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지난 백여년 동안은 너무나 심각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너무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너무나 많이 소비하고, 너무 많이 버렸다. 너무나 맹목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다.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다. 유발하라리도 농경 이전의 사회로 회귀하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서, 개구리보다 조금 더 진화된 동물적 본능으로라도 가까운 장래에 현실로 닥칠 기후변화위기를 인식하고, 비이커 속의 개구리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기 전에 전세계의 정부-기업-개인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백만 년이 흘러 발굴된 인류세Anthropocene 지층에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지 않으려면 말이다.
어쨌든 인간이 개구리보다 미련한지 여부는 앞으로 10년 남짓만 지나면 판가름이 난다. 따뜻한 물 속에서 목욕을 즐기다 삶아진 개구리가 될 지, 아니면 마지막 시간과 힘이 남아 있을 때 물을 박차고 비이커 밖으로 뛰쳐나올 지. 달리 말하면, 자연의 영속(永續)을 책임지는 만물의 영장임을 입증할 지, 아니면 그냥 개구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지는 전적으로 인류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무섭게 다가오고 있다.
부디 ‘개구리보다 인간이 더 미련하다.’고 생각한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후변화위기에 대해 나보다 더 현명하게 판단하고 실천할 것이라 기대하며, 오늘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아껴 쓸 것인 것인지,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겠다. 이 글도 나의 부끄러운 양심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이다. 끝.

copyright©2023 All rights reserved by Gyeong-Rok Kim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