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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 놈의 기억 1
  • 윤이나
  • 12,420원 (10%690)
  • 2021-06-10
  • : 109

-망각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처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나는 망각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수많은 잘못과 실수에 대한 기억들이 예고 없이 덮쳐와 후회와 자책감에 몸서리치게 만들 때면 내겐 망각만큼 간절한 것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되뇌던 변명과 사과가 이따금 입 밖으로 튀어나와 흠칫하고 주위를 둘러볼 때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우울이라는 파도를 몰고 와 그 속에 완전히 잠겨버릴 때면, 그런 스스로가 못 견디게 싫을 때면 신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망각의 물약을 찾아 목숨을 건 모험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윤이나 작가의 추리/미스터리 소설 <놈의 기억> 역시 망각은 축복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사람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식까지 할 수 있다는 논문을 게재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는 뇌과학자 한정우. 그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 괴한의 습격을 받아 의식을 잃고, 나흘 만에 깨어났을 때는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무런 증거도 뚜렷한 용의자도 없는 상황. 한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정우는 괴로움에 몸서리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어린 딸이 충격으로 말을 잃고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점차 안정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반년이 지나도록 딸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한정우는 결국 자신의 이론을 이용해 딸의 기억을 지운다. 다행히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린 딸은 망각의 축복 속에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런 딸과 반대로 한정우는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타인의 기억까지 기꺼이 자신에게 이식하기를 선택한다. 그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주는 치료를 하며, 강력팀으로 일하며 범인을 검거하다가 칼에 찔려 칼 트라우마에 걸린 친한 동생 인욱의 기억을 삭제하고 자신에게 이식하며 범인을 잡기 위한 준비로 기억을 다루는 연습을 한다. 그는 망각의 축복을 얻는 대신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기억에 매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기억의 중요성을 알고 끈질기게 달라붙은 그는 마침내 타인의 기억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낸다.


네 기억 속에서 내가 사건 당일에 지수에게 사 준 귀걸이를 봤어. 한국에 세 개밖에 없는 거라고 했거든. 그 귀걸이가 내가 산 게 맞는다면…. (32p)

작은 단서로 시작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기억을 뽑아 자신에게 이식시키며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한정우. 나 하나의 기억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괴롭건만 그는 놈의 기억을 찾기 위해 기꺼이 타인의 기억을 제 것으로 만들어나간다. 그건 괴롭고 또 괴로운 일이라 이식 직후에도, 일상을 보내는 사이에도 그를 고통에 휩싸이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따라 끊임없이 달려나가고, 마침내 그 끝에 다다르게 된다.


그를 기절시키고 아내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사람들의 기억은 어떻게 얽히고설켜 진실로 이어질까? 놈의 기억은 어떤 진실을 담고 있을까?


얽히고설킨 기억들을 쫓아 그와 함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찼다. 그리고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진실에 도달했을 때는 일순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과연 한정우는 망각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은 것일까. 그의 딸은 망각으로 인해 더 나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망각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따금 밀려오는 기억에 휩쓸릴 때면 나는 지난날의 후회를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 이 기억을 교훈 삼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자, 정신 차리고 살자. 그리고 그와 같은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더 나은 오늘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힘들어도 그게 삶이었고,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놈의 기억> 속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간만에 읽은 추리 소설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평일 퇴근 후 <놈의 기억> 1권을 펼쳐들었다가 새벽 늦게 잠들고, 그 다음날 하루 종일 2권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정도였다. 처음 전개가 너무 빠르고 몇 년이 통째로 생략되어 당황스러웠던 것만 빼면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억과 망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도 있었으니, 내겐 꽤 좋았던,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자유롭게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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