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비하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형이상학적인 것)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자연과학적인 것)들에 의해 말해질 수는 없으며, 단지 예술과 종교 등에 의해서 보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구름이 많다'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이 슬프다'라는 것은 말할 수 없고 단지 '눈물 흘리는 모습'에 의해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강신주 선생님의 강의노트 참고)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따른다면 분명히 진리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진리를 찾기위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을 과연 참된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진리는 우리의 언어적인 표현으로는 감히 드러낼 수 없는 그런 영역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헤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와 같은 이름을 지닌 싯다르타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러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문 싯다르타는 부처를 만나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가르침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부처는 거기에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싯다르타는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부처의 제자로 있기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다시 세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온갖 쾌락을 접하며 세속에 찌들어 버린다. 결국 그는 다시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 그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포인트다. 그는 뱃사공인 바주데바와 함께 뱃사공일을 하며 강의 소리를 듣게 되고, 자신의 삶을 자각하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싯다르타는 그 깨달음이 뭐다라고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의 깨달음을 도운 바주데바도 진리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진리란 말해질 수 없고 따라서 가르쳐질 수도 없고 '살아보임'으로서 표현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헤세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자기 말이 진리라고 설파하는 자가 왜이리 많을까? 게다가 그 내용은 대부분 욕망을 부추기는 말들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짓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집단인, 경쟁을 진리로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헤세가 보여주고자 했던 참된 자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경쟁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니네끼리만 경쟁해보고 살아보이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