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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폴님의 서재
  • 진보에 반대한다
  • 슬라보예 지젝
  • 16,200원 (10%900)
  • 2026-02-13
  • : 4,270
『진보에 반대한다』는 제목만 보면 진보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보’라는 말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를 끈질기게 되묻는 책에 가깝다. 이 책은 진보를 자명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흔들며, 그 언어가 때로는 사고를 밀어붙이기보다 안도와 정당화의 기능을 해왔다는 점을 드러낸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위험과 위기를 다루는 방식이다. 재난과 전쟁, 핵위협 같은 문제는 일상적으로 소비되면서 오히려 익숙한 배경처럼 받아들여진다. 지젝은 바로 그 무감각 자체를 중요한 문제로 본다. 파국은 예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이미 경험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도 이 책의 핵심 중 하나다. 지젝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직선적으로 정리하는 역사관을 문제 삼는다. 과거는 지금의 현실을 향해 예정된 길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과 우연한 분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현재를 필연적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자연스럽게 의문을 던진다.
후반부에서 다루는 권위의 문제도 오래 남는다. 이 책은 권위를 단지 전통적 억압의 잔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의 자유와 선택의 언어 속에서도 더 미세하고 비가시적인 권위가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선택의 자유가 강조될수록, 실제로는 이미 설정된 구조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이 책 전체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를 향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남한과 북한을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공백을 재생산하는 극단으로 읽어내는 시선이 제시된다. 특히 남한의 이세계 전생 서사를 현실 변화의 상상력이 다른 세계로 밀려난 징후로 해석하는 부분은 다소 의외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친절한 해설서나 명쾌한 결론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다. 대신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던 개념과 태도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진보에 반대한다』는 진보를 폐기하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진보라는 익숙한 언어에 기대어 사고를 멈추지 말라고 요구하는 책으로 읽힌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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