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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X 의 살롱
  • 외딴방
  • 신경숙
  • 13,050원 (10%720)
  • 1999-12-06
  • : 8,616

 ... 

 

그 시절, 나의 시선은 줄곧 사람들의 양말로만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양말에 수놓아진 문양에 꽂혀 있었다.
그것이 눈에 익은 문양이면 난 무심결에 중얼거리곤 했다.
저건 아디다스, 저건 아식스, 저건 리복, 저건 프로스펙스, 저건 나이키...
근데 저 나이키는 부직포를 제대로 안댔군. 실밥이 삐뚤어졌어.
저 리복은 왁구를 제대로 안끼고 기계를 돌렸네...

그렇게 마지막 검품하는 자세로 하나하나 뜯어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 스무 살의 나는,
미세먼지 폴폴 날리는 공장 안에서,
하루 수천켤레의 양말에 수를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양말을 수놓기 좋게 만든 왁구에 끼운다.
그 왁구를 바늘이 촘촘히 달린 기계속에 밀어 넣는다.
몇 초안에 기계가 자수문양을 수놓으면 재빨리 다른 왁구로 갈아 끼운다.

이것이 기계로 양말자수를 놓는 절차다. 아주 쉽다.
익숙해지다 보면,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나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쉽다.
때때로 갈아 끼우는 타이밍을 못 맞춰 자수바늘에 손을 찔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2인1조인 다른 파트너 한명은 수량을 맞추기 위해 죽어나야 한다.

그렇게 손에 상처 한 두개쯤은 예사로이 여기던 여자들 속에
대학을 휴학하고 나온 스무 살의 나도 속해 있었다.
그해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이란 잔치를 치르느라 축제분위기였다.
스무 살의 나와 바늘에 찔린 손을 가졌던 여자들은 열심히 왁구를 끼고 또 끼었다.
양말에는 동강난 부메랑처럼 생긴 나이키 문양이 매일 예쁘게 수놓아져 갔다.

... ...


난 모델이 되고 싶어.

스무 살이 넘은 나이로 야간학교에 다니던,
긴 머리에 커다란 엉덩이를 가졌던 여자가 수줍게 꿈을 이야기했다.
주제도 모르는 꿈이라고 조롱받을까 두려운 얼굴로,
여자는 재빨리 ‘피팅모델’이라고 수정했다.
스무 살의 나는, 그러려면 살을 빼고 모델학원을 다녀야지, 라고 속으로 말했다.

난 예쁜 가게를 갖고 싶어.

우리중에 가장 고참이었던,
손톱에 매니큐어를 참 예쁘게 잘 칠했던 여자도 꿈을 이야기했다.
스무 살의 나는, 그러려면 시골에 보내는 돈을 줄이고 저축해야지, 라고 속으로 말했다.

난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난 노래를 하고 싶어....

스무 살의 나는, 기숙사앞 뜨겁게 끓어대는 보일러물에
초벌빨래를 마친 속옷이 든 비닐봉지를 넣고,
속옷이 푹푹 삶아지며 올라오는 하얀 김을 보면서,
여자들의 꿈이 마치 저 하얀 김 같다고 생각했다.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1미터 어디쯤에선가 사라져버리는 하얀 김처럼,
저들의 꿈도 그렇게 스러질 거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눈물조차 사치스러운, 아니 오만한 슬픔이었다.

얼마 후, 예쁜 가게를 차리고 싶다던 손톱 예쁜 여자는
중매결혼으로 그곳을 떠나 탄광촌으로 갔다.

... ...


넌 우리랑 다르잖아.

바늘에 손을 찔린 여자들 중 한명이 말했다.
회사에선 날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위장취업한 대학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해 들어왔을 뿐인 스무 살의 나는 그 말이 억울했지만,
또한 그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 반박할 자신도 없었다.
나의 꿈은, 그들의 그것처럼 스러지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낄 가슴은 있었지만,
그들의 꿈에 통로를 만들어줄 수 있는 힘은 없었다.
...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탄광촌으로 떠났던 여자가 근처에 온 김에 잠시 들렀다.
윤기가 흘렀던 여자의 머리는 부스스해져 있었고,
언제나 색색깔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던 손톱은 갈라지고 부러져 있었다.
그때, 스무 살의 나는, 말없이 손톱만 바라봤던 것 같다.
그 손톱에 진분홍빛 매니큐어를 듬뿍듬뿍 발라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수바늘들 사이로 날렵하게 움직이던 그 예쁜 손을 다시 보고 싶었다.

... 그녀가 다시 탄광촌으로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스무 살의 나도, 그들을 뒤로 한 채 떠났다.
나의 생을 낚으러 그곳을 떠났다.

... ...


나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20여년 전의 그 1년은 지금도 내 습성에 문신처럼 남아 있다.
나는 가족들 중 누구보다 양말을 잘 갠다.
지금도 종종 타인의 양말에 시선이 간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그녀들이 생각난다.

지금의 날 보면,
그녀들도 <외딴 방>의 하계숙처럼,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라고 나에게 말할까?

... 그녀들이 생각날 때면 종종 말없음표가 내 심장을 때린다.
둥... 둥... 아프게 때린다.

난 지금도 세상을 바꿀 힘 따윈 없다.
다만 한 인간의 순결한 꿈에는,
우주를 바꿀 힘이 들어있다고 믿게 되었을 뿐이다. 
... 아니, 그렇게 믿는 쪽이 안믿는 것보단 낫다고 믿을 뿐이다.
 

나는... 스무 살 그때의 나는...
속으로만 삼켰던 그 말들을 내뱉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이 말들을 전해줬어야 했다.

지금의 꿈을 잊지 마.
잊지 않고 있으면 할 수 있어. 꿈을 잊으면 그걸로 끝이야.
언제나 꿈 가까이로 가려는 마음을 거두지 않으면 할 수 있어.
가고 또 가면 언젠가는 그 숲속에 갈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못 가도 그 근처엔 가 있을 거라구.

그리고... 언젠가는 그 꿈이 건져내 줄거야.
우물 속에 빠진 채 침묵하고 있는 너희들만의 쇠스랑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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