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weceo님의 서재
  • 경영의 신 1
  • 정혁준
  • 13,500원 (10%750)
  • 2013-01-18
  • : 328

경영의 신'이라는 책제목 자체가 완전 돌직구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신화는 없다'라는 제목을 사용한 것부터 시작해서 '공부의 신'이라는 말이 최근 미디어 등에 회자되면서 이런 책제목도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게 된 듯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소위 경영의 신은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LG 창업자인 구인회 그리고 현대 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씨에 대한 내용들이다.

  책에서는 이들의 어린시절부터 '경영의 신'이 되기까지의 노정을 추적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보면 이병철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면서 컸다. 그 과정에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생활도 해보고 요정 출입도 하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언제나 철이 들려나 하면서도 아버지는 이런 막내의 객기를 허용해주고 기다려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노름판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와선 곤하게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대오각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계기 치고는 너무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병철씨의 경우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어부쳐서 되게 만드는 정주영씨와는 달리 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문가에게 귀를 기울이는 등 정보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최종 결정에 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물품들을 자체 생산해서 내수 시장을 일본이나 미제 상품으로부터 탈환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데이터와 분석에 근거한 투자 결정 성향은 박정희 대통령의 압력에도 부화뇌동하지 않게 됨에 따라 사업 허가와 관련해  정부의 방해에 부딪혀 애를 먹기도 한다.  이병철 씨의 경우 덩치가 큰 데 비해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중화학 공업보다는 작아도 부가가치가 큰 전자산업 등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사돈지간(LG 구인회)의 의를 깨뜨리면서까지 전자산업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낳게 했다. 나아가 천문학적인 시설투자가 필요한 반도체산업에도 과감하게 뛰어든 이유도 부가가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정주영씨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번에 걸친 가출 끝에 정미소를 통해 돈도 벌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 일제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수탈이라든지 인플레이션, 오일쇼크, 위정자의 압력 등의 난관이 늘 따라다녔지만 그 때마다 좌절은 커녕 위기를 기회로 삼아 숱하게 기업을 일구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계획을 밀어부칠 때, 대통령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기업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고속도로 건설과 중동진출과 맞물려 현대건설이, 철재의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선박건조를 위해 현대상선과 현대조선이, 대북관계증진을 위한 대북협력사업의 신호탄인 개성공단 조성 등등이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정주영씨의 경우에는 이병철씨와는 달리 꼼꼼한 계산에 의해서라면 결정할 수 없는 것들로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주로 이뤄졌다. 또 정주영씨에게 한 가지 특기할만한 부분은 그는 현장 중심형이었다는 것이다. 현장이 있는 곳에 그가 있었고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이 위기의 순간을 돌파하는 비법이 되었다.

  구인회씨의 경우는 그다지 지역 유지라고 까지 할 수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의식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친과 조부는 장남의 사업 의지를 꺽지 않고 지원해주었다. 또 한 동네 사람이었던 허씨 집안과도 자금을 끌어다 쓸 때나 실제 사업을 운영할 때나 유연하게 뜻을 같이 하고 동업을 했다. 흔히 동업관계는 오래 가지 못하고 깨어지기 일쑤고 평생 원수로 지내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들의 관계는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동업관계는 50년 이상 지속되었고 마침내 서로 박수를 쳐주면서 기분 좋게 LG와 GS로 사업을 분리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병철씨가 전자사업을 뛰어들어 금성전자의 아성에 도전했을 때도 구인회씨는 삼성이 먼저 시작한 제당 사업에 뛰어들진 않았다. 그 만큼 관계를 중시했고 인화를 먼저 생각했다.  

 

  이들 모두는 오늘날의 빅 3사의 창업자들로서 당시의 시대상에 걸맞는 기업가들이었다. 해방 직후였고 6.25.가 발발했고 모든 게 부족하고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수입 의존이 아니라 자체 생산이 급박한 품목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 폐허 더미에서 사회간접자본부터 구축해야하는 단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법론과 뚝심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이런 종류의 안목이나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이들 3명이 달랐던 것은 시도 또는 실행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를 보면서도 예상이 되면서도 보통 나서지를 않는다. 그 만큼 실패할 위험도 많고 희생이 따르고 댓가지불이 커서 두려운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해보는 것이라면 대개의 경우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법칙 아닌 법칙은 이들 세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실패들은 이들을 더 지혜롭게 만들어줬다. 실패는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 시도하지 않도록 발목을 잡는 것일 수 있지만 이들에겐느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재밌는 것이 있었다. 이들이 20~30대를 보낸 때는 일제시대였다. 어떤 젊은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에 매진했을텐데 이들은 유독 돈 버는 데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돈이 벌리는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와 싸우던 시기에 이들은 눈치를 봐가면서 감시를 피해 가면서 돈 번다고 정신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나무랄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나라의 독립과 나라의 발전을 생각하는 애국심은 밑바닥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구인회씨의 경우에는 아무리 손에 쥐어봐도 일제가 뺏어가는 상황에서 차라리 언제나 그대로 있는 토지에다 투자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마자 부동산 사업을 벌였던 것이 아니라 거의 마진을 챙기지 않고 땅이 필요한 개인에게 전부 았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일인당국민소득 2만불도, 나로호를 쏴 올려 항공우주분야 11위국에도 들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들은 사업을 하고 기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국가의 특혜를 많이 입었다. 국가는 경제개발을 통한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기업이 필요했고 기업은 차관도입과 금융지원 및 세제혜택을 위해서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공생관계는 부작용도 있었다. 대기업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반면 중소기업들은 더 이상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대기업의 하청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고 대기업은 받았던 특혜가 부메랑이 돼서 권력자의 비자금 조성에 부역을 해야했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이들 3명과 같은 남다른 탁견과 추진력으로 기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은 분명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장을 중시하고 분배를 소홀히 한 부작용으로 한국 사회는 최다 노동시간, 최다 학습시간, 최고 자살율과 같은 또 다른 몸살을 겪고 있다. 이젠 초고속 성장의 이면에 그 동안 도외시해 왔던 분배배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복지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3명이 필요한 시기이다.   


www.weceo.org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