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스레인지 앞에서 천천히 죽을 저었다...
이 대목에서 '죽을 저었다'가 '죽을 거였다'로 읽혔다. 당황했다.
인간이 생각하는 흐름이 이렇게 단순한가? 아니면 이렇게 몰리는가?
둘 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것이 인간이고, 이 책이 그런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에 공감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한 줌 마음 속 태풍을 안고 사는 멸치들, 같은 인간들 말이다.
똑똑한 소재를 똑똑하게 풀어냈다. 작가는 한 치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독자들을 챙긴다.
아마 자신이 이 분야의 마니아이기 때문에 예우를 지켜주는 듯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의 순조로운 진행과 마지막의 폭발을 방해하진 않는다.
추리가 풀리는 지점에서는 짧은 탄성이 나온다.
반전도, 성과도 아닌, 이 이야기에 적확한 마음의 범인. 그것에 놀란다. 왜?
이야기에서 놀라고 내 마음의 어둠에 놀라고.
작가가 건드리고자 한 것도 그것이고, 그걸 이렇게 세련되게 풀어낸 작가의 똑똑함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히가시노니 미야베니 까불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 장황한 일본 사회의 어두운 텍스트를 읽느니,
이제 선량한 시민들의 비밀들을 읽는 데 독서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우리 이웃의 척박하고 비밀스런 실정, 말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지x2) 기대될 따름.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기존의 소설은 대부분 엉터리라는 대담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정치한 인과관계에 의해 사건이 일어나고 마무리되는지 창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인생에는 복선도 플롯도 없다. 성격은 충동에 의해 무너지고, 기억은 소망에 의해 왜곡된다. 인생은 무질서한데 왜 소설 속 이야기는 그토록 질서 정연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짓을 다 보고 계신다!"
"좆 까는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내일 아침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도 안 믿는 사람이야!"
그 순간에 창수는 웃음이 푹 튀어나왔다. .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 지능을 넘지 못할 것 같은 두 남자가 한쪽은 절대적 믿음을 대표하고, 다른 한쪽은 절대적 회의를 대표하여 치고받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카프카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하죠."
"왜요?"
"이해할 수 없으니까?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너무너무 알고 싶지만, 속속들이 알고 싶지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요. 답답하죠."
"답답함이 좋아요?"
"나를 애태우게 하니까."
"그럼 나는 우리 시아버지를 좋아하는 거네."
"그럴 수도 있죠.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연으로 보이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는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걸 찾아내는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