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구매하면서부터 웃어버리는 최민석 작가의 여행에세이.
이번에도 웬만한 예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해프닝과 웃프닝이 와글와글하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 멕시코-콜롬비아-페루-칠레-아르헨티나-브라질을
후다닥 섭렵하는 그의 여정은, 브에노스 아이레스의 햇반 같은 느낌이다.
햇반 무시하지 마라. 해외에서 30일 간 느끼한 양식만 먹다 위장이 느글느글해
오바이트 할 것 같다가 마침내 발견한 한국식품점에서 구한 햇반을 전자렌지에
돌려 막 개봉한 한국 아재만이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최민석 작가의 문체를 따라했지만 역시 맛이 나지 않는다!
해외여행의 동반자 햇반 같은 이 이야기는 여행욕을 자극하고 해외를 그립게 만든다.
코로나로 갇혀버린 세상에서 그 먼 남미를 대신 여행해 주고, 곤란과 배탈, 호구질을
섭렵하며 마침내 글로까지 완성해 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실 농담과 개그가 난무하는 그의 글 속 문득문득 내비치는 진실과 진심을 놓칠 수
없다. 마치 수줍은 고백처럼 작가는 지나가는 말 하듯 삶의 정수를 내뱉는다.
가령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기 생에 충실했다. 적어도 내가 공연을 본 삼십 분 동안만큼은, 한순간도 충일하지 않게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직업 예술인이다. 그렇기에 창작은 물론, 창작에 관련된 모든 행위가, 이를테면 '삶을 위한 쟁기질'이 돼버렸다. 그렇기에 쟁기질이 즐겁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 10년 동안 매일 똑같은 밭에 나가 온종일 밭을 갈았는데, 그것이 어찌 마냥 즐겁기만 하겠나. 하지만,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
물론, 일상을 사랑한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글을 쓰고, 매일 걷고 달리고, 아이를 돌보고 아내를 일터로 태워다 주고 데려오는 내 일상은 소중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왜 이런 일상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잊어버린 채, 나는 스스로 만든 공장의 부품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하더라도, 그 단순한 삶을 좀 더 충실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일상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일상을 지키다 보니, 내가 왜 이런 일상을 구축했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맹목적인 일상의 노예가 돼버린 것이다.
이제 알 것 같다.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로서의 예술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이라면?
일상으로 돌아가 어찌 해야 할 지를 알게 되었다면, 충분히 값진 여행 아닌가?
그의 좌충우돌 여행은 이렇게 툭툭 진실의 조각들을 떨구며 행진한다. 그 조각들을
맛보고 곱씹고 다 소화하기도 전에 다시 최민석 스타일의 푸념과 허무개그에 젖곤
하지만, 충분히 훌륭한 밸런스다. 유머라는 범퍼를 곳곳에 장착한 그의 소프트웨어가
정말이지 부럽다.
아울러 콜롬비아가 콜롬부스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볼리비아 역시 볼리바르라는
장군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것,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좋은 공기 혹은 좋은 분위기라는
뜻이라는 것, 남미에서는 저가항공보다는 라탐항공을 이용하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것과
공유 숙소보다는 이비스가 무난하다는 것 등 깨알같은 지식들은 물론, 빠시엔시아!
에시페라. 아스타 루에고. 세까도! 등의 스페인어 기초 역시 배울 수 있다.
정말로 무이 비엔이다!
나 역시 늘 꿈꾸었던 남미 여행이었지만 두렵고 조심스러운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주저하는 마음이 많았다. 이제는 여행도 익숙한 곳만 반복해 찾는 것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용감무쌍하게 지구 반대편에서 온몸으로 여행을 수행한 그의
이 기록이 값지다.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은 책, 이것이 40일간의 남미 일주에
바치는 내 감상이고, 그 중에서 베스트 에피소드는 역시 24시간 동안 구매한 세 켤레의
신발이 아닐까? 세까도여서 세켤레인가? 아무튼 세까도는 건조고, 이 책으로 인해
절대 까먹지 않을 스페인어 단어가 되어버렸으며 거기에 기여한 작가의
나이키 러닝화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의 다음 여정과 그 기록을 기다리며... 아스타 루에고!
나는 직장인보다 바쁘게 살아야, 겨우 직장인처럼 살 수 있는 '세뇨르 노벨리스타 민숙 초이'이니까 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어차피 일상을 떠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겠다고 왔으니 주저하지 않는 게 낫다. 그 경험이 자신에게 안전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데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미지의 영역에 있는 그 경험은 결국 미련의 영역으로 갈 것이다.
가려 하면, "에스페라(기다리시오)!"라며 영수증을 주는데, 내 온갖 정보가 빽빽이 적혀 있고, 그 과정이 워낙 길어 '환전 대학교' 졸업장이라도 받은 것 같다.
이래서 예술가는 살아생전에 성공해야 한다. 고흐처럼 사후에 유명해지고 인정받아봐야, 생전에 스스로 귀를 자를 만큼 참혹하게 살 뿐인 것이다. 모차르트의 생가에 방문했을 때도 느꼈다. 그렇기에 내가 살아생전에 문학적 성공을 거두는 방법은 한 가지다.
성공할 때까지 죽지 않는 것이다.
'아들아, 미안하다. 아비는 벽에 *칠하더라도, 쉽게 못 간다.'
눈이라도 조금 붙이려 했지만, 알고 보니 이 기차의 좌석은 8할 이상이 4인석이었고, 그 덕에 난 지금 한 3인 가족(어머니, 두 아들)과 함께 마치 급히 '재결성된 가족'처럼 앉아 있다.
'아저씨가 우리 새아빠예요?'
이제 알 것 같다.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결심은 부끄러워 쓰지 않겠다. 그리고 역시 안다. 결심을 공표하면, 결심을 바꿀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그 공표한 결심이 나의 굴레가 되어, 결심한 의미가 퇴색돼버린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