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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인 책을 말하다
  • 개념과 주제로 본 우리들의 윤리학
  • 박찬구
  • 19,000원 (5%1,000)
  • 2006-06-20
  • : 852
윤리학 책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한 건 [니코마코스 윤리학] 때부터였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무리 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이를 만났고 , 함께 읽어야 할 책인 듯 하여 - 자고로 철학이라는 말은 이미 철[鐵]의 학문이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쌓았고 스스로 유리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시작해보았으나 , 역시 그 길은 요원하여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벌써 몇 년 전- 저의 기억의 시간은 더딥니다만 물리적 시간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의 일입니다. 

촛불이 켜지고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사람이 만든 권력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고 권좌에 앉은 자의 도덕성이라든가 윤리의식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일 수 없나 하는 단순한 의문이 들었던 탓입니다. 다시 마음 속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심각한 결정장애와 선택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주변에 말해두지 않으면 생각만 하다 마는 경향이 있어서 말입니다. 또 주변에 소문을 내느라 나무늘보 한 걸음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혼자서는 방향도 못 잡을 일이었습니다. 철옹성의 학문에 어디를 건드려야 미세한 균열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쇠몽둥이로 벽을 쳐서 균열하는 지점을 찾는 장인의 정신처럼 단박에 찾아 수 없을테니 벽의 여러군데를 망치로 두드려본다는 심정으로 여러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았습니다. 윤리학이란 책도 있고 에티카라는 책도 있고 많았습니다만 철벽같은 언어였습니다. 그러니 언어조차도 틈을 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찾다가 보니 [개념과 주제로 본 우리들의 윤리학]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 째 고비는 책을 펼치자마자 시작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보았거든요. 언어철학자라고 알고 있는데 도덕에서 만나니 생경했고 들리는 소문에 어마무시하게 어렵고 난해하다는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만났으니 난감했지만 다행히 슬쩍 지나갔습니다.

두 번 째 고비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였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철학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철학자가 한 분 계시는데 바로 칸트 옹입니다.

칸트의 의무론에서처럼 도덕이라는 것이 정언명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면 우리는 왜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도덕과 무관한 이유를 대라는 요구인셈이다. 즉 그것은 정언명법을 가언명법으로 바꾸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의 벽을 넘어설 수 없기 대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통찰한 사람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물음은 사실상 사이비 물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물질문명에 물든 그래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병든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들의 윤리학 145쪽]

저는 한 순간에 사이비 물음을 묻는 질문자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철옹성의 철학에 또 한 번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잠시 책을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미 두드리기 시작해으니 두드리기라도 끝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책을 마저 읽습니다.

고대 덕윤리부터 시작해서 평등과 정의 자유에 대한 장을 읽을 때 ‘강자의 덕으로서의 정의‘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제가 찾고자 했던 사이비 물음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을 잡을지도 모르는 단초- 혼자 생각중인 -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강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강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야기가 필요 없다.문제는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강자임을 입증한 그가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서 강자가 단지 자신의 주관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행하는가 아니면 객관저 가치 질서에 입각하여 행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강자의 권리는 자기 자신의이익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 능력 늘 최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도 벅찬 약자는 갖지 못한 능력 즉 정의로울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정의는 강자의 덕이라 말했던 이유이다.

[우리들의 윤리학 197쪽]

저의 균열은 이미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만 읽어도 될 듯합니다만 윤리학 책을 읽다보니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공리주의 철학 칸트의 실천이성 같은 것들을 공부해야 강자의 덕과 윤리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 발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뿌린다음 달군 철판을 걸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염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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