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침묵의 봄 126쪽
무심히 글을 읽다가 발견한 레이첼의 물음에서 잠시 쉬어가야 했다. 인간이란 종에게 권위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범 우주적 시선에서 보자면 그저 지궁 사는 한 점 생명체일 뿐이지 않은가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어느 선생의 말씀에선가 인간은 너무 거대해도 미세해도 보지 못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시각이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저 인간이 말하는 권위란 인간이 만들어낸 유악한 관념일 뿐이지 않을까? 여튼 생각하다보니 자연이라는 거대한 체계 속에서 다른 종에게 피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다.
화학약품 제조업체가 실행하는 시렇ㅁ은 쥐 개 기니피그 같은 일반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할 뿐 야생생물종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새와 물고기에 대해서는 실험이 이뤄지지 않으며 그나마 시행되는 실험도 통제되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환경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실험 결과를 자연 속의 야생동물에게 적용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151쪽
다시 126쪽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살아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는 과연 ?이라고 나는 물었다. 화하자들의 동물 실험은 인간외ㅣ의 생명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도 되는 생각해보았을까? 동물실험이 화하 물질 살포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살충제에 노출된 적이 없는 일반인의 조직에서 상당량의 DDT가 검출된 것은 음식 때문이다. ...... 과학자들은 DDT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207쪽
화학제품의 살포는 대상종만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종들까지도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토양이 오염되고 토양 속의 벌레들이 오염되고 새들이 오염되고 지하수가 오염되고 사람들이 오염된다.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화학물질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그 피해의 끝은 죽음이다.
화학제품의 살포에서 대량 생산하여 이익을 취하는 농업산업의 한 단면을 아니 인간의 욕심을 본다. 더 많이 생산하고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 앞에서 그 외의 것은 외면당한다. 인간의 욕심이 인간을 붕괴시킨다. 자멸하는 인간들은 자멸의 끝을 향해 가면서도 과학의 세례를 입었다는 자아도취와 자기 최면에 안식을 취할지도 모를 일이다.
레이첼 카슨은 DDT와 화합물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도 화학물질로 된 해충방제를 하지말자고는 말하지 않는다. 최소화해서 해충 종만 섬멸할 것을 요구한다. 보통의 편향적 론자‘들은 모 아니면 도 식의 화법을 구사하지만 레이첼 카슨은 그런 주장을 펴지 않아 불편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처음 글을 읽으면서 DDT라는 낱말을 접했을 때 겹쳐지는 낱말은 베트남 전쟁과 고엽제 후유증이었다. 이 때 당시에도 인간에게 미치는 화학물질의 악영향에 대해서 앍고 있었을 텐데도 전쟁의 승리라는 대의 앞에 인간의 존엄과 동식물의 안위는 외면 당했던 것 , 한국 참전 군인들의 고엽제 후유증이 보여주는 인공화학물질의 위험성이 겹쳤다. 엄폐된 진실들 호도하는 국가권력의 횡포와 광기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화학물질들이 조합되어 생산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인간은 죽음과 고통의 삼자 동거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게 화학제품에 노출되어 살고 있으니 말이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당연히 인간이 견디고 인간에게 유해한 정도의 화학물질이라지만 인체에 안전한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침묵하는 것이 봄이 아니라 , 봄의 다음 차례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