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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의 욕조
  • 모든 저녁이 저물 때
  • 예니 에르펜베크
  • 15,300원 (10%850)
  • 2018-07-20
  • : 1,275

흔히 노년기를 저녁 무렵에 빗대어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였다고 표현한다. 서정적인 은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일상생활 시간이자 인생의 한창 때를 의미하는 낮이 곧 끝난다는 것은 모든 공식적인 생활이 끝나는 저녁, 즉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제목은 사뭇 섬뜩하지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았단 말인가?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독일에서 인정받는 현대문학 작가인 예니 에펜베르크의 작품이다. 에펜베르크는 이 책으로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잉게보르크 바하만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녀가 왜 인정받는지를 이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녀 자신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문체와 작가 특유의 역사의식 그리고 탄탄한 내용 구성력이 어우러지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장과 장 사이에 끼어 있는 막간극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의 공통적인 주인공은 ‘큰 딸’이다. 그녀는 장(障)마다 다른 이유로 죽음에 이른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는 경우, 갓 성인이 되었을 쯤 사랑하는 남자에 실연을 당하고 처음 보는 남자에게 죽여 달라고 한 경우, 히틀러 시대에 스파이로 지목당해 처형당하는 경우, 어머니가 되었으나 발을 헛디뎌 계단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 경우, 노년에 치매를 앓다가 요양원에서 죽는 경우가 나온다. 이렇게 매번 죽음으로 끝나는 각 장은 바로 막간극으로 연결된다. 막간극에서는 앞선 장에서 나타난 죽음을 ‘만약 이렇지 않았다면~’과 같은 가정으로 그녀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경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삶을 서술한다.

 

특히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크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나치정원, 소비에트 시대, 독일 통일 후라는 시대 흐름이 나타난다. 작가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삽입된 이런 정치, 사회, 역사적 변화상은 당시 사람들이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했는지를 굉장히 잘 드러낸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중

 

매번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나고, 제목마저도 죽음을 암시하는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인 이 책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이다. 매 장마다 주인공이 죽고 주인공 주변 인물도 죽음도 그려지며 죽음이 강조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 때문에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삶이 강조된다.

 

에펜베르크는 여러 시점에서 주인공인 큰 딸의 삶과 죽음을 서술한다. 그녀의 출생과 성장,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랑, 자신의 업적을 세우고 자식을 기르고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는 모습이 장마다 토막 토막 들어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도 러프하게 담았다. 유대 집안에서 태어나 상점 일을 돕는 주인공의 어머니와 상점을 운영하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 전염병에 걸려 죽은 주인공의 친구와 전쟁에 나갔다 생환했으나 애인을 잃은 친구의 애인, 함께 문학모임을 했던 동지들. 이들을 비롯한 주인공과 함께 시대를 살아나간 사람들의 삶은 주인공의 삶의 이야기와 맞물리며 묘사된다. 이들은 모두 죽음을 목도했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이 그들의 곁을 지나쳐가는 것을 보면서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삶이 남은 사람들은 계속 자신의 삶을 산다. 자신의 애정을 나눠가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마음이 미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내가 살아있기에, 존재하고 있기에 괴로워도 계속 살아야 하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저자는 그렇게 삶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죽음을 보여주며 오히려 삶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보았다.

 

아마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 막 지나온 그 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일 것이다. 세계 전체는, 그녀의 삶이 이제 종말을 맞게 되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세계 전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중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존재하기에 삶을 산다. 저자는 막간극을 활용해 삶의 한 순간마다 내가 내린 결정에 따라 삶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어머니와 아버지, 주인공, 주인공의 지인들이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녀의 죽음이 미루어졌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막간극마다 이야기 한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나의 삶을, 더 나아가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삶을 강조하면서 ‘지금’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한다. 우리는 언제 어떤 선택을 해서 끝에 이를지 모른다. 현재 내가 내리는 결정 하나 하나가 미래를 만들고, 그것이 과거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기에 지금이 중요한 것이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고민하며 문학을 읽어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번 읽으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책을 읽은 것은 낯선 경험이었지만 소중했다.

한 장 한 장마다 좋은 글들이 많아서 빨간 색연필을 들고 읽다가 색칠놀이를 할 뻔 했다.

많은 독자들이 실험적인 문체가 도드라져 보여서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렇지만 비록 내가 원문 대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번역가가 충분히 저자의 원래 의도에 가깝게 번역하면서도 한국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 많이 엿보였다. 번역가께 박수를...!

전체적으로 편집도 굉장히 깔끔해보인다. 가제본이기에 단정지어 말할 수 없지만, 이것도 편집자께 박수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과 삶이라는 제재를 이렇게 낯설게 마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구성하고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지게 하는 저자에게도 박수를!

문학에 권태기가 온 사람들에게, 또 서사의 힘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주고 싶다.

예니 에펜베르크의 서정적인 묘사와 독특한 문체, 그리고 탄탄한 구성이 어느새 당신을 이 책에 매료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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