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독서모임을 위한 모임자료를 게시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의 원문 발췌는 박스처리 하였고 페이지만 표기하였습니다.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본서 1판 8쇄를 사용하였습니다.
1.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발전한 일본의 미래가 세계의 미래라는 희망적인 전망이 저물고 잃어버린 10년이 1991년부터 진행되어 10년이 흐른 200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로부터 다시 25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우리는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일본인 독자들과는 다른 사회현실과 문화산업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야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찾아 읽은 이유는 아래 질문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의 인간은 서사를 엄청나게 많이 소비하는데, 왜 ‘문학’이라는 제도화된 서사는 상대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웹소설·웹툰·드라마 같은 서사물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제가 처음 갖고 있던 질문이었고 아직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굳이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처럼 복잡한 설명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론에서 텍스트의 소비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가 주목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 환경은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캐릭터·음성·분기 등 서로 다른 기호를 데이터베이스에서 호출하고 조합하는 소비 방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오타쿠 현상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동인지와 같은 기성문화 생산/소비의 틀을 넘어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환경에서 비롯된 콘텐츠의 첨단성과 연결지어 접근해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1990년대의 애니메이션을 넘어 "미소녀 게임"이라는 콘텐츠 양식에 툭히 주목합니다. 이 이형(異形)이고 이질적인, 그러나 동시에 최-첨단인 문화현상에 대한 젊은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은 동물화 하는 오타쿠들에 대한 절망과 함께 그들이 품은 희망의 감정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YU-NO를 집중 비평하는 "3장의 초超평면성과 다중인격"에서 엿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지난 선정도서인 <지의 관객 만들기>를 통해 "겐론"의 창립과 경영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겐론의 여명기는 2010년부터입니다. 제게 있어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늦어도 2013년도 정도부터 알고 있던 책이었고, 그 이전부터 오타쿠론을 다른 서적을 통해 접해왔기에 "잘 분석했고 흥미롭지만 대단치 않은 책"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즈마 히로키의 경영실천 과정인 겐론에 대해 알게 되고부터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책이라고 평가해 봅니다.
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로 적응했을까?
우선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지와는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정리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사회적인 기원에 대해서 제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패턴에서 주목하는 주변성은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 획득 경쟁에서 물러나 새로운 욕망 충족 체계에 접속하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경로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주변부에 머물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독을 즐긴다. Nobody가 아닌 Somebody가 되고 싶다면 획득한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체념하고 물러서야 한다.
무엇이 내게 만족과 위안을 주는가?
분노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는 이유는 만족, 또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성실한 자에게 분배될 복을 기대하고 다음 기회를 추구하는 것과 같은 오래된 태도가 있겠다. 그렇지 못하다면 기존의 세계관, 가치관을 다른 것으로 변경,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체념과 물러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쁨의 박탈'보다 '고통의 억제'가 마음의 우선순위로 자리잡는다. 행복했던 시절의 회상, 더 안 좋은 삶을 짊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 명백한 환상임을 알지만 몰두하여 즐김 등의 접근이 있겠다.
그 중에서도 어떤 콘텐츠가 싸고 빠르게 작용하는가?
내가 속한 집단에서 전염성이 있는 것, 내가 오랜 시간 접해와서 익숙한 것, 호모소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현실의 도피로 오독될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강한 순응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도태론이 나온다. 이 지점으로부터 이형(異形)의 서브컬처를 단지 여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접속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욕망체계가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로 소비하는 인간형이 있는 것은 아닐지 추정해 볼 수 있다.
모임 질문 1. 오타쿠 문화는 어떻게 서브컬쳐로 형성되었으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이후에도 왜 주변부적 성격이나 혐오의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가?
저는 이번에 재독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 처음의 질문, 즉 사람들이 왜 ‘문학’보다 웹소설·웹툰·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을 훨씬 많이 소비하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아즈마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 일본의 잃어버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적응해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2. 아즈마 히로키의 두 질문
2010년대 정도부터 급격히 발달한 SNS로부터 인공지능 대한 논의가 이 저작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대부터는 겐론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원래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미소녀 게임과 오타쿠론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점차 첨단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데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만드는가’로 문제의식이 되돌아가고, 경영실천에 분투합니다.
지금 2026년에는 그의 아래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매우 바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AGI가 완성되기 이전까지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나 도구에 머물겠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하는 핵심 실체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포털에 직접 검색하는 경험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주된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의 기능과 위상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스타트업 신화는 기성 교육의 후진성을 중퇴자 출신 창업가라는 신화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피터 틸과 같은 투자자가 직업 개설하는 창업 시스템에 ‘진학’하는 현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1. 포스트모던에서는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소멸하고 시뮬라르크가 증가한다. 그렇다면 그 시뮬라르크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일까? 근대에서 오리지널을 창출하는 것이 ‘작가’였다면, 포스트모던에서 시뮬라르크를 창출하는 것은 무엇일까?
2.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실조되고 ‘신’이나 ‘사회’도 쓰레기junk 같은 서브컬쳐에서 날조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근대에서는 신이나 사회가 인간성을 보장하며 구체적으로는 종교나 교육기관이 그 실현을 맡고 있었다면, 그 양자의 우위가 실추된 후에 인간의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임질문2. 질문 (1)은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실생활에서 작동하는 이상 미국 빅테크의 사업이 창출한다고 대답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두 번째 질문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봅시다.
3.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에서 해리적 인격까지
코제브는 전후 미국에서 대두한 소비자의 모습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강한 표현이 쓰인 것은 코제브의 독특한 인간 규정과 관계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더욱 정확하게는 코제브가 해석한 헤겔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그 자체로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과의 투쟁이 있어야만 한다.
이에 비해 동물은 항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mode)가 바뀌어 가는 전후의 미국의 소비사회는 코제브의 용어로는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물적이라고 불리게 된다. 거기에는 군주도 투쟁도 없는 대신 철학도 없다.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이 그들의 기념비나 대성당이나 터널을 건설한다 해도 그것은 새가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 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코제브는 초조하게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한편, 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다. 스놉은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 이것이 궁극의 스노비즘이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은 자연과의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이 되지 않는 것이다. 119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라는 냉소주의
지젝은 그 긴 이행기의 정신을 훌륭하게 반영해 그 구조를 가장 알기 쉽게 이론화한 사상가일 것이다. 20세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초월적인 커다란 이야기는 이미 없어졌으며 또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의 가짜를 날조하고 커다란 이야기의 겉모습을, 즉 사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겉모습을 믿어야 했던 시대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저쩡하게 포스트모던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기 때문에 산다는 역설은, 지금이야 이미 그 무게를 잃어버렸지만 지난 냉전시대에는 지극히 절박한 사고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 127
스노비즘이란 생물학적 욕구나 생존의 필요를 넘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위해 행동하는 태도이다. 코제브에게서 스노비즘은 인간이 자연적·동물적 욕구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해리적 마음의 움직임은 어쩌면 독자에 따라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는 반드시 그 배우의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소설은 하나의 결말밖에 갖지 못했고, 또 그 결말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포스트모던의 노벨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유한한 요소가 우연의 선택에 의해 조합된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재현 가능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한번 던진 주사위의 결과는 우연인 동시에 필연이라는 의미에서 역시 필연이며 재현 불가능하가도 말할 수도 있다. 커다란 이야기에 의한 의미 부여를 운명으로 생각할 것인가, 유한한 간으성의 다발에서 선택된 조합의 희소성을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여기에는 소설과 노벨 게임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 근대적인 삶의 기법과 포스트모던적인 삶의 기법의 차이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는 지면 관계상 오타쿠계 문화밖에 검토할 수 없지만, 보다 넓게 시뮬라르크 수준에서 생겨나는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 생겨나는 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이 해리적인 공존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을 사는 주체를 일반적으로 특징짓는 구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147
예를 들어 한 인물의 사랑이나 실패, 성장과 몰락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계급사회, 근대화, 가족제도, 인간의 자유와 같은 더 큰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경우겠습니다. 이때 인물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동시에 더 큰 문제를 이해하게 하고, 반대로 그 사회적·역사적 맥락은 인물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
저의 경우 주로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웹을 접하지 않은 19세기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저작들을 소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근대의 책읽기>(천정환)의 일제시대 독자의 독서를 연구한 책을 읽으면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05~2009년도에 ‘읽는’ 것을 즐기는 학생은 거의 웹소설과 NT노벨과 노벨게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특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거나 <레 미제라블>을 읽더라도 이들이 그런 서사물을 소비하는 까닭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원작으로 삼거나 래퍼런스하고 있는 작품을 소비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잦았습니다. 단적인 사례는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하겠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어반 판타지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영령 길가메시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온 기사도 있으므로 공유드립니다(막내 편집자-게임 유저가 합작해 만든 ‘15년 만의 역주행’). (2) SF, 판타지, 스릴러 장르의 고전 서사물들이 웹에서도, 제 또래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독서 정전의 위치 취급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유년기의 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말 할 것도 없고, 톨킨을 넘어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가 유행을 하고, 본격적인 의미에 미스테리물이 유통됩니다. (3) 마지막으로 NT노벨 원자의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공전의 히트, 타입문, 리프, 키와 같은 회사들으 노벨 게임이 불법다운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가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저의 경험에서 의문점 하나를 해소해주었습니다. “왜 텍스트를 그토록 많이 읽는 친구들이 19세기의 저작물들을 읽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려워서라거나 장르가 달라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난해하고 어려운 서사를 갖기로는 오히려 노벨 게임이 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보다는 애당초 다른 텍스트였다고 봐야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범주를 나누어서 다른 텍스트 상품이라고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그치만 이러한 분류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는 기준에 따른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었습니다. 근본적인 설명을 원헀습니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말을 신뢰한다면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그다지 과격한 이론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PC게임과 그 시대의 캐릭터 노벨은 다른 인간형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임질문 3. 아즈마 히로키가 강조하는 지점은 여기로부터 이탈해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오타쿠는 시큘라르크 레벨의 작은 이야기를 욕구하고, 데이터베이스적인 욕망을 갖고 커다란 비야야기를 욕망하는 인간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을 해리적 인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의 의미가 이해가 되시나요?
4.
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 정도부터 겐론(ゲンロン) 경영을 시작합니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겐론은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오프라인의 중요성(‘사람이 모이는 곳’)과 오배송이 있는 공간이 하나로 묶이고,
(2) 다른 하나로는 좋은 관객이 좋은 문화를 만든다, 계몽의 강조이 하나로 묶인다고 보겠습니다.
아즈마 히로키 본인의 내적 성장으로는 호모소셜과의 결별을 고백하고, ‘나와 같은 사람’을 모으는 내부지향적인 공간을 만들기를 포기합니다.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을 통해 1999년 제21회 산토리 학예상(사상·역사 부문)을 수상하고 데뷔한 28살의 비평가였습니다. 그 후 2년 뒤인 2001년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을 간행하며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 사회론을 제시합니다. 그의 일본 사회론은 오타쿠라는 특정 집단의 문화를 바탕하기 때문에 비약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고, 미소녀 게임의 소비와 제작과 같은 소재 자체의 성격과 지나친 미사적 분석인 점은 그의 사회론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꾸준한 활동으로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흥미로운 일관성을 보여주는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인포테이먼트 성격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지 않은 점, 본래 그의 강점인 최첨단의 논제와 그의 팬층인 맹우들에 대한 서비스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층의 사람과의 교류를 통한 사회관계를 만들고자하는 시도가 주목됩니다.
모임 질문4. 나의 생활에서 어떤 경험을 선택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