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달과 6펜스>를 읽고 스트릭랜드에 대해서 당장 드는 질문은 세 가지다. 왜?
[1] 왜 마흔의 나이에 가족과 직장, 그리고 재산을 모두 버리고 떠났는가?
[2] 어째서 타히티라는 섬에 도달했는가? [3] 그의 질병과 죽음, 마지막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
이 소설에서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의 동기에 대한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같이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의 동기와 예술가로서의 성장의 이야기는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본인의 어떠한 설명도 핑계도 없다. 단지 이렇게 되뇐다. “I‘ve got to paint.”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해.
교앙소설과는 다르다. 스트릭랜드의 캐릭터는 탐정소설과 더욱 어울린다. 우리는 스트릭랜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관찰자인 나레이터의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전달 받는다. 그는 재구성된 짧고 생생한 드라마로만 등장한다.이 덕분에 작가는 광인에 가까운 그의 독특한 내면 독백을 서술하지 않아도 된다. 짧은 장면들에서 겉으로 들어나는 말과 행동만으로 스트릭랜드를 그려나가고 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를 제공한다. 나레이터는 도덕적인 상식엔 공모하지만, 동시에 부도덕한 예술가의 삶에도 공모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Ms.스트릭랜드, 더크, 블란체, 갱, 티아레, 선장, 의사, 아타, 그리고 아브라함까지. 위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여러 겹으로 스트릭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쌓는다. 추리 소설의 서술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직접 서술해 버릴 때 사라질 미스테리를 보존한다.
스트릭랜드의 캐릭터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점과 매력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앞서 언급했듯 나레이터의 캐릭터를 전달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재미없는 구간이 드물고, 손에 땀을 쥐고 읽게끔 한다. 나와 다른 영혼의 고귀한 독백 따윈 없다. 나레이터가 정교하게 취재한 사건들과 배경들을 통해 캐릭터의 상황을 추론하게 한다. 훌륭한 탐정소설의 재미다.
캐릭터의 내용 측면에서는 어떨까? 통과의례를 거쳤음에도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만스러운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나름 잘 해냈음에도 불만족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도덕적으로 존중 받을 수 있는 삶을 유지하는 걸로 충분한가. 그는 파리에 가서도 루브르를 관람하지 않는다. 타인을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대가로 지불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따를 수 없는 선택들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실험실 약을 기준으로 분열했다면, 스트릭랜드는 마흔의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하는 순간 분열했다. 사회의 일원인 우리는 그의 부도덕 하지만 속시원한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타히티는 매혹적인 소재다. 이 섬은 뉴질랜드에서 북동쪽으로 600km를 더 항해해야 도착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영국의 지리적 대척점이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태평양을 향해 벗어나 있다. 이곳은 폴리네시아 인들의 땅이고 그들은 원시적인 문명의 단계에 놓여 있지만 뛰어난 항해술을 지녔다. 달과 6펜스, 범인과 천재, 영국과 프랑스, 문명과 원시의 삶. 거듭되는 이미지 대조가 타히티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언제나 소설에서 모험과 항해는 영국인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소재였다. 로빈슨 크루소 경을 보라. 그는 바다와 외딴 섬들에 맞닥드리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광야를 체험했고 극복했다. 영국인들 인생사에는 산티아고가 마주한 사막의 광야보다 난파로 빠져드는 더욱 익숙하고 끔찍한 광야가 있어왔다. 태평양의 섬이 스트릭랜드 삶의 마지막 무대다. 세계는 작아졌고, 내가 출발한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졌다
이곳에서 아타Ata를 얻고 집을 갖지만 병을 얻는다. 그 질병이 정신병mental dissease이었다면 그의 운명은 이토록 비극적이지 못 했을테다. 스트릭랜드는 욥의 고난을 받는다. 아타는 무슬림들의 이름으로 ‘선물’을 뜻하고 이곳에서의 몇 해는 그의 가장 행복한 시절로 여겨진다. 티아레는 백인 스트릭랜드가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젊은 여자를 권하였고 그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스트릭랜드가 행복했을거라고 여긴다. 브뤼노 선장은 자신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자신처럼 스트릭랜드가 행복했을거라고 여긴다. 노동의 힘과 스트릭랜드의 손의 노고로 완성되는 예술을 동등하게 신성하다고 말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문명의 불만에서 해방된 사람들일까?
어쩌면 스트릭랜드가 문명을 등지지 않았다면 고대의 질병이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을테다.
질병은 그를 순식간에 앗아간다. 아타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함께 살았던 오두막을 불태운다. 영국에서 타히티로, 아타의 오두막으로 스트릭랜드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멀어진다. 의사는 작은 오두막에서 최후의 작품을 본다. 벽화이다. 프랑스인 의사는 이 벽화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빗댄다. 동굴의 벽화가 인류의 첫 예술 작품 중 하나였던걸 기억하라. 스트릭랜드는 산의 동굴에 올라가서 혼자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아타가 그를 붙잡고 원시의 삶에서 여성의 품에서 그림을 그리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한다.
오두막이 사라진다. 질병이 머물렀던 자리였고, 위대한 예술작품이 있던 자리이며, 위대한 예술가와 그 아내가 살아갔던 집이 사라진다. 나레이터는 글의 초입에 밝혔다. (자신은 그림과 그림 그리기에 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그의 인격과 관련된 부분만 다룰 뿐 작품 자체를 다루지는 않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후의 작품에 대해 공들여서 철저하게 묘사한다. 여기에 아이러니와 미스테리가 있다. 물론 알리바이가 있다. 이것은 단지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였고 스트릭랜드의 우주였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스트릭랜드가 남긴 그림들은 어딘가에서 천재의 작품으로 귀중한 대접을 받거나 복제되어 심지어 그의 전 부인의 응접실에 걸려 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더 구하지 못해 안달을 낸다. 나레이터는 이 작품들에 대해서 묘사할 묘사할 기회가 있음에도 한사코 서술하길 사양했다.
그러나 최후의 걸작. 아타와 아들, 그리고 의사만이 목격한 작품에 대해서는 다르다. 이제는 불타버려 눈으로 볼 수 없는 소우주와 스트릭랜드의 죽음을 함께 엮어낸다. 의사로부터 들은 증언과 자신의 솜씨 중 무엇이 더 기여했을지 알 수 없다. 스트릭랜드는 인류사의 원시로 회귀한 문명인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이 소설 서술 전략에서 제일 절묘하다. 글로 그림을 묘사하는 곡예를 부리지만 읽는 독자들은 납득할 수 있다. 이미지/그림을 다루는 예술가인 화가에 대한 소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낸다. 서머싯 몸의 탁월함이 빛나는 장면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림과 이야기 속 비극적 죽음의 캐릭터 스트릭랜드 중 우리는 무엇에 대한 문장을 읽는지 더는 구별짓지 못한다.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가와 그 영혼이 숨쉬는 하나의 사라져버린 작은 세계라면 글로 전달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