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격주로 운동 삼아 도서관에 들른다. 집에서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린데 요즘은 자전거 타고 다니는 중. 원래는 <지브리의 천재들>을 빌려오려고 했는데 자리에 없더라. 그 뒤로 쭉 대여 중인 거 보면 겹친 듯…
하여, 대신 전부터 탐내던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를 빌려왔다. 표지가 워낙 마음에 들어서 탐내고 있었는데 저자는 코니 윌리스지 SNS 친구가 표지에 혹해있는 나를 보고 추천까지 해줘서 사는 게 먼저냐 읽는 게 먼저냐 상태였기 때문에 눈에 띄자마자 집어왔다. 원래 도서관에서는 비문학(중에서도 특히 에세이류)만 대여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요. 마침 도서관에 들렀을 때 읽던 책이 <밤의 언어>라 둘을 바꿔 읽으면 되겠거니 싶기도 했다.
그나마도 본래 대여기간 안에는 못 읽어서 한 주 연장하고 읽었다. 원래는 안 읽고 반납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궁금하더라고. 그리고 서문을 읽고 생각했지. 이건 다 읽고 반납해야한다!
때마침 <밤의 언어>를 읽는 중이어서 더 그렇게 느낀 거겠지만 대가들은 까다로운 게 보통인가보다. 어슐러 르 귄도 코니 윌리스도 어쩜 그렇게 취향이 섬세하고 확고한지. 물론 그런 점을 더할나위 없이 좋아하기는 한다.
서문에서 코니 윌리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극명한 호불호를 드러낸다. 이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좋고 저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싫다고 갖가지 예시와 함께 줄줄이 늘어놓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코니 윌리스와 내 취향은 정말 꼭 닮았다. 크리스마스라면 사랑과 희망이 넘쳐야죠. 하지만 아이러니가 없어서도 안 돼요!
코니 윌리스의 소설을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인데 수월하게 읽히는 정감가는 문장과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너무 좋았다. 단편집이라기엔 전체적으로 좀 길어서 대부분 중편~단편 사이쯤 되는 듯.
< 기적 >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건데 역시 미국인들도 명절 새는 거 힘들어한다.
크리스마스가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의 놀이판이지만 미국에선 가족 명절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읽으니 실감이 난다. 서문에서 언급된 <멋진 여행>과 <34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주요 소재로 다뤄지는데 둘 다 본 적 없는 영화라 아쉽다. 나중에 꼭 봐야지.
앞서 읽은 코니 윌리스 소설은 하나 뿐인데 그때 기억이 가물거려서 조금 긴장하고 읽었었다. 그런데 참 부드럽게 잘 읽혀서 역시 코니 윌리스! 했다. 코니 윌리스는 은근히 연인의 사랑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단 말이야.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야기라서 그런지 좋았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종류든 사랑이 가득해야 즐겁지 않던가.
<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
원제는 All about Amily 였던 것 같다. 확실치 않은데 책을 반납해버려서 확인할 수가 없네. 개인적으로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든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인공지능 로봇을 다루다니 이것 또한 ‘역시 코니 윌리스!’다. 표제작인만큼 인상적인 이야기라서 조금 자세히 적어본다.
화자는 한때는 전설이었던, 어쩌면 지금은 한물 갔을지도 모르는 여배우로 앞선 단편 <기적>과 마찬가지로 다른 영화/연극이 계속 언급된다. 그 영화/연극에 나오는 특정 인물의 상황에 계속해서 비유가 되는데 나이든 여배우가 젊은 여배우에게 밀려난다는 이야기다.
그러던 와중에, 화자는 인공지능 로봇 에밀리를 만나게 된다. 에밀리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해한 외모와 성격으로 설계된 인공지능 로봇이다. 얼마나 정교한지 비를 맞으면 파리하게 질려선 애처롭게 떤다. 에밀리를 만든 박사는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선호라는 것이 없으며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만을 한다고 주장하고, 화자는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서 특정한 것을 택할 수 있는 선호가 있다면 당연히 욕망도 존재한다고 속으로 반박한다.그리고 곧 화자의 판단은 옳았다고 증명된다. 에밀리가 수많은 소녀들이 선망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다고 소망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는 로켓 무용단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화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화자는 에밀리를 성심성의껏 돕는다. 에밀리가 자신의 일자리, 즉 배우의 자리를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면서. 에밀리를 만든 박사는 다른 문화권에 맞게 설계된 인공지능 로봇을 데리고 출장을 나간 상태였고, 에밀리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리고 박사가 돌아와 에밀리를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어하기 전 상태로 되돌린다.
이때까지의 섬세한 설계도 좋았지만 이후의 전개와 결말이 충격적일 정도로 좋았다. 화자는 에밀리에게 제안했던 동정심 사기 작전을 자기가 실천한다. 추위에 떨며 서명 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의 자신 같았던 에밀리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비교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모두가 말리고 비웃을지언정 어린 시절 꿈 꾸던 자신의 머릿속을 열어 꿈을 지워버린 사람은 없었노라고. 그건 정말 부당하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사람을 너무 닮은 인공지능과 그런 인공지능을 경계하는 사람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설령 인공지능이 사람의 자리를 탐낸다고 해도, 그건 결국 인간의 욕심이 낳은 비극일 것이다. 가장 하찮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다면, 가장 고귀한 인간도 대체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기보다는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 우리 여관에는 방이 없어요 >
현대의 교회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일상적이고 평범한 미국 교회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단편이다.
주의 자비를 찬미하는 크리스마스 예식과 교회를 찾은 노숙자들을 쫓아내는 현실이 대비된다. 화자인 샤론은 추위에 떠는 요셉과 마리아를 교회에 들였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언제 들켜서 쫓겨날까 안절부절 못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숨기며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는 사이 이 어리고 꾀죄죄한 부부가 길을 떠난 요셉과 마리아란 사실을 깨닫고 나사렛으로 가는 길을 찾아주는 이야기.
굉장히 신비롭고도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성경에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재미가 없겠다 싶다. 늘 이야기로 들어온 사람들이 내 세상에 파고들어 생기는 기이한 사건이 생겼다는 환상적인 느낌, 현재의 여러가지 상황이 섬세하게 짜여있다.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 현대 미국 교회 사람들의 연례행사를 적당히 귀찮아하는 모습이 이 작품에서도 나오는데 인상적이고도 기분 좋다.
<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
이것도 크리스마스 이야기치고는 굉장히 독특한 소재다. 타임 슬립 정도는 흔하지만 외계인이 나오는 건 정말 드물잖아요. 외계인이 나오는데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어울리는 건 더더욱 드물 게 틀림없다.
못마땅하게 노려보기만 하는 아주아주 이상한 외계인이 나오는 이야기.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바람에 온 미국이 당황한다. 외계인 앞에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중 하나인 화자가 계속 연구를 하다가 결국 답을 발견한다.
이때 좋은 답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재밌다. 아주아주 비위를 맞추기 어려웠던 친척 어른의 사례를 떠올리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외계인에게도 고집스런 친척 어른에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훌륭한 예의가 있다. 거기에 맞추지 않으면 제대로 대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대를 그저 노려보기만 하다가 예의를 갖춰 말을 걸 때만 반응하는 외계인의 반응이 재밌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사적이지 않나. 무례하다고 화를 내고 떠나버리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그저 노려보기만 한다는 게. 결국은 서로 인사하고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이 참 크리스마스다웠다.
< 코펠리우스 장난감 가게 >
이 책에서 가장 짧은 소설인데 인상적이면서도 재밌었다. 화자인 남자놈이 너무너무 재수없고 싫은 인물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거든. 그게 이런 결말일 줄이야! 장난감 가게를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장난감이 되어버린 못된 남자의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웃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 장식하세 닷컴 >
원제가 특이해서 원제를 눈여겨보게 된 마지막 소설. deck.halls@boughs/holly라는 제목이었는데 정확히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 몇 개는 알겠는데 몇 개는 정말 모르겠음.
약간 미래의 이야기인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않고 통신으로 대화한다. 화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주는 전문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와는 크게 관련 없는 장식을 하는 듯하다. 그에 대한 소소한 항의라던가 반전이 재밌었다. 결말은 새로운 사람과의 로맨스인데 뻔하다면 뻔하지만, 나는 이런 크리스마스 이야기 좋아한다.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키스로 끝나는 그런 거. 크리스마스는 용서와 자비의 날이라는 이야기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해 크리스마스다운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는 소중한 명절이구나 싶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읽다보니 한국의 명절 이야기는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없잖아 들었다. 명절 이야기도 많아지면 좋겠다. 명절마다 그 날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많아져서 그걸 가족들끼리 함께 보고 웃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