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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ien Siarte님의 서재
  •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 스테프 차
  • 12,420원 (10%690)
  • 2021-04-23
  • : 396
이 책 표지 너무 예쁘다. 다 읽고 난 후의 심란함마저 근사하게 표현해주는 멋진 표지와 제목을 보라.

사실 이 책 감상문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자기만의 방을 읽고도 이랬는데 워낙 다양한 감상이 들어서 오히려 말을 고를 수가 없다. 표지와 제목 이야기를 했으니 거기서 시작해볼까.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Your house will pay.
표지의 성냥 이미지는 LA폭동을 상징하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제목을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그거다. 연대책임. 네가 아니라 네 집이 고통받으리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아닌가. 그 집이, HOUSE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게 말 그대로 집, 건물인지 그 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둘 모두를 의미할 것 같다. 이 소설의 시발점에 존재하는 한정자와 에이바의 가족 모두가 집을 잃었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네가 무엇을 하든 네 집 모두가 고통받게 될 거라는 끔찍한 예언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거망동하면 곧바로 실행될 게 분명한 그런 예언. 누군가에게 크게 밉보여서 그에게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느껴지는 제목이다.

요즈음 한국에는 페미니즘이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만치 각광받고 있는 주제다. 내 짧은 인생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요 몇 년처럼 흔하게 들리는 때는 없었다. 그게 내가 이제서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즘 인권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무지하고 게으른 내 귀에도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주로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들려오고 있다. 거기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입장을 분명히 하는 노력을 안 해온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들이 한 번 싹 지워졌다가 새롭게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건 두 주인공 중 흑인 축의 인물인 숀 매슈스의 조카가 실종되었을 때 경찰에 신고하길 꺼린 부분이다. 흑인이고 한창 나이인 청소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에 알리면 안 된다고 한다. 경찰의 눈에 그 애들은 예비 갱단 멤버일 뿐이니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같이 떠오른 건 제일 첫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어린 숀의 입장에서 제 사촌 레이(윗 문단에서 실종된 조카의 아버지)를 설명하며 레이가 갱단의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갱일 수 있었다고 한 문장.
흑인은 누구나 갱일 수 있고, 갱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흑인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숀은 실종된 조카를 찾아 나서기 위해 아기를 안아야 했다. 그래야 그가 체포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숀과 그 사촌 레이는 징역을 살았던 적이 있다. 범죄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민주시민으로서 법을 준수해야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틀림없이 모든 흑인이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허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더 좋은 길이 있고 더 좋은 선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가족을 잃고 항의할 기회조차 잃은 소년들이 어떻게 살았어야 했던 걸까. 경찰은 그들을 준범죄자 취급할 뿐이고, 최소한의 보호도 해주지 않는데. 붙들어줄 끈을 잃고 방황하는 부표가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갔다고 원망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한국에서 여성이 경찰에 구조 요청을 해도 무시당할 때가 태반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요 몇 년 사이 몇 번을 들었나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국 여자들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무용할 지언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데 저들은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지푸라기인 줄 알고 잡았던 것이 물귀신이 될까봐 그런다. 아니, 높은 확률로 물귀신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자란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피부 밑으로 파고드는 듯하다.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은 두순자 역할을 한 한정자씨의 딸 그레이스 박이다. 사건이 있은 후에 성까지 바꿔서 날 때부터 박씨는 그레이스 뿐이란다. (성을 바꿀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엄마에게 있었던 일은 전혀 모르는, 사건 당시 뱃속에 있었던 아기 그레이스다.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놀랐다. 미국 내의 한인 사회가 이런 것이라면, 현재의 한국과 다른 게 없다. 어른들은 고지식하고 구시대적이고, 딸들은 그런 어른들의 통제 속에서 순종적으로, 때로는 반항적으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른들은 제 자식이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고, 동시에 모든 것을 알기 바란다. 지금 내 삶과의 차이점이라고는 지나치게 적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한인 사회 뿐이다. 그곳은 마치 우리네 시골의 이야기라고 알려진 것처럼 옆집 밥숟가락 갯수까지 아는, 그런 작은 사회다.
너무도 흡사한 환경에 나는 그레이스의 이야기의 홀린 듯 빨려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짜증을 내고 어이없어했다. 물론 한정자의 사정은 독자라는 입장상 훨씬 빠르게, 그리고 전혀 놀랍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그레이스와 호흡을 같이 했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고 착한 처녀 그레이스는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게다가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그만 다른 사람을 원망했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에이바의 가족들마저도 그레이스를 비난하지는 못 했는데.
한정자가 에이바를 쏴죽인 대가로 총에 맞아 정신을 잃은 사이, 그 충격을 견뎌야했던 건 그레이스 혼자였다. 가족들은 모두 과거의 사건을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가족이 아닌 다른 한인 커뮤니티 사람들마저도. 그레이스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그런 그레이스가 에이바의 가족에게서 구원을 구하려고 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그레이스와 마찬가지로 총격으로 세상이 휘청거리는 경험을 한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읽으면서는 그레이스의 행동을 조금도 납득할 수 없었고 화가 났다. 에이바의 기록에서 흠을 잡으려고 하고 어떻게든 엄마가 정당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려는 모습이 너무도 이기적이었으니까. 이런 태도는 그레이스만이 아니라 작중 등장하는 한인 커뮤니티 전체가 동일하다. 어떤 행동을 했느냐와는 무관하게 그저 내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싸준 것 말이다. 한국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런 내 마음마저도 다스리고 가라앉혀야한다고 말한다. 한정자 사건이 있었던 시점에 한인들은 삶을 지탱하는 것이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갱단이 두려움의 원천이기도 했을 뿐더러 그들은 이민자였다. 굴러온 돌이었다. 박혀있던 돌을 뽑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힌 돌이 그들을 배척한 건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켄 리우의 단편 소설, All the flavors도 참 많이 떠올랐다. (한국 제목은 <모든 맛을 한 그릇에>고 역시나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 실려있다.) 그것을 겹쳐보니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에서는 언뜻언뜻 반감이 비치는 정도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만만한 저항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의 부모가 자신이 일궈낸 작은 가게에 그토록 자부심이 넘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게다가 소설에 의하면 한정자 사건(두순자 사건)이 그토록 크게 다뤄진 것은 로드니 킴 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주목을 모으자 그 대안으로 끌어온 것이 한정자 사건이라고.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확인해보니 날짜가 정말로 얼마 차이가 안 나기는 했다. 예전에 학교에서였던가. LA 폭동에 대해 배울 때도 그동안 지속된 차별 때문에 쌓인 불만이 한인 커뮤니티를 향해 터진 거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언제든 기회를 잡아 쫓아내고 싶은 대상이었을 거라는 느낌은 든다.

소설은 한정자 사건의 가해자인 한정자의 딸 그레이스 박과 피해자인 에이바의 동생 숀 매슈스의 시점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숀은 결코 한정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딸인 그레이스의 순진함에도 분노하지만 끝끝내 그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반대로 한정자의 딸인 그레이스와 미리엄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쏜 대릴이라는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서로 미움과 증오를 가슴에 묻은 상태로 그들이 등을 맞대는 모습이 이 소설의 엔딩이고, 나는 작가가 그저 미래를 고민하는 것으로 끝을 내준 것이 고맙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실제로 어떤 말과 행동도 그들이 품은 아픔과 원망을 해결할 수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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