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인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짐을 의미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넓게는 한 국가의 국력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로 판단된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체를 통해 경제 성장률이 언급되고 국민들 모두 경제 성장을 초미의 관심사로 두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런데 경제 성장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 낳아왔을까? 부유해지고 평화로워 질수록 인간은 만족했는가? 그렇지 않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은 탐욕이 끊이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과 극단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처럼 경제 성장과 물질적 번영 속에서 그 반대의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해답을 다니엘 코엔의 [악의 번영]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문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현대까지의 경제사를 총망라하며 어떻게 서양이 경제의 중추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왜 번영과 공황이 찾아오게 되었는지, 세계화속에서 위기와 교훈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꼼꼼히 되짚어 본다.
왜 서양인가?
재학시절 한국의 경제사와 동시대 서양의 경제사를 비교하는 강의를 들었었다. 덕분에 서양이 조선과 달리 경제적으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1부에서 다루는 서양에 관한 주제는 친숙한 분야라서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서양, 즉 유럽은 고대 지중해 세계와는 대조를 이루는 기술적 창조성과 경제적 역동성의 개화를 경험하였다. 19세기 공업화가 실현될 때까지 유럽의 농업은 모든 면에서, 특히 생산과 고용, 노동력 측면에서도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농업을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생기면서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더불어 해상무역을 통해 상업조직이 생겨났다. 또한 정치와 군사, 과학 모두가 번성하게 되는데 이처럼 축적된 노하우가 있는 유럽은 세계 어느 곳 보다도 빠른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고 경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번영과 공황
그러나 번영이 있다면 그 대가도 따르는 법. 2부 번영과 공황에서는 서양이 성장의 길에서 몰락으로 걷게 되는 과정을 독일과 미국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독일은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보다 빠르게 발전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계 강대국이 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1920년대 황금기를 누렸지만 주식시장의 대폭락과 함께 대공황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같은 서양 선진국들이 겪었던 전환적 사건들을 이 책은 콘드라티에프 순환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콘드라티에프 순환은 성장과 침체가 25년간씩 순환된다는 법칙이다. 재미있게도 주기를 살펴보면 경기침체 시기에는 사회적으로 평온했고 반대로 경기성장 시기에 전쟁이 많이 발발했다고 한다. 경제 성장이 오히려 국가의 전쟁 욕망을 키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국가가 경제성장으로 인해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할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능력을 영토 확장을 위해 쓰는데 결과로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경제 성장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 셈이다.
세계화의 시간
3부에서는 세계화를 겪으면서 생기는 정체와 생태계 위기, 금융위기, 디지털시대 등 자본주의시대의 최신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신흥국인 중국과 인도를 사례로 들며 그들의 발전이 세계 경제에 좋은 영향만을 주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며 문제점을 꼬집었다. 한편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통해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디지털 시대에 신경제의 모습을 되짚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바로 미래이다. 이렇게 현대가 불확실성으로 혼란스러운데 미래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의 해답은 앞으로 모든 국가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경제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관련된 주제 때문인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을 역사의 흐름으로 읽어간다는 것과 세계 경제사를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악의 번영]이란 제목에서 '악'을 경제 성장으로 봐야 하는지는 아직 결론짓지 못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여전히 날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장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사고방식에도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한국의 성장우선주의 세태를 반성하게 한다. 이 책에서 다룬 굵직한 경제 사건들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한국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서양이 겪었던 값비싼 그 길을 한국이 다시 걷지 않기 위해서는 책에서 말하는 교훈을 깊이 새기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