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Chomsky)의 연구실에 버틀란드 러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촘스키는 러셀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래서 촘스키의 언어 역시 러셀처럼 명료성과 논리성을 중요시한다. 촘스키가 러셀에게 배운 것은 이 뿐이 아니다. 그는 러셀의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도 배웠다. 반전운동과 핵 확산 반대운동을 일선에서 이끌며 90세가 넘은 나이에 감옥까지 다녀왔던 러셀. 촘스키도 그의 행동을 본받았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정부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한다. 촘스키는 미국의 행동하는 양심이 되었다.
수학전공자 러셀과 언어학전공자인 촘스키가 조우하는 지점이 철학(Philosophy)이다. 러셀은 본래 수학 전공으로 그의 스승 역시 수학자 화이트헤드(A.Whitehead)였다. 마찬가지로 본래 문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던 조지 에드워드 무어와 함께 교유관계를 쌓은 러셀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걷어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무어와 러셀의 생각에 당시 헤겔류의 철학은 너무 엉뚱하고 사소한 문제를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주절거리는 말장난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을 걷어내는데 가장 주요한 작업은 바로 언어를 정제시키는 것이다. 언어의 정제는 수학의 힘을 빌려 논리학작업으로 환원된다. 아주 이상적이고 무오류의 수리적-논리언어를 만들어내야 이 철학적 혼돈이 사라진다. 그래서 그들의 학파가 분석철학이다. 이때 분석한다는 것은 더 넓은 범주의 맥락을 함의하지만, 주요한 분석의 대상은 바로 '언어(Language)'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혼돈은 바로 언어에서 기인한다고 그들은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의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아예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한다"라고 선포했다.
촘스키 역시 히브리어 전공으로 학위를 따내었지만 대학원 시절 누구보다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촘스키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을 때 나 역시 이 점을 촘스키에게 물었는데 "나는 철학 학위는 받지 않았지만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철학 필드의 여러 훌륭한 인물들과 교류할 기회도 있었다."라고 답을 해주었다. 실제 언어학 필드를 벗어나 철학 필드위에서도 그는 콰인이나 퍼트남 같은 미국의 분석철학 거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다.
촘스키 역시 철학에 빠지면서 이런 저런 철학자를 알게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대륙철학이 아니라 영미철학으로 크게 기울고 있었다. 이는 그가 몇년전 지젝을 공격한 지점과 맥락이 닿아있다. 영미철학자들이 보기에 대륙철학자들은 너무 엉뚱한 이야기를 매우 있어보이는 개념과 전문술어를 나열하며 지껄이고있다. 결국 촘스키도 분석철학의 길을 걷게된다. 그는 자신의 저서(Language and Mind)에서 언어학의 연구방법이란 철학의 연구방법과 매우 흡사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전적으로 분석철학자의 시각에서 본 철학의 연구방법론이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의 부유하는 이성 개념을 빌려와 종래의 귀납적 언어습득론에 반기를 들었고 통사론(syntax) 위주로 언어학 전체를 판갈이해버렸다. 촘스키안 스쿨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이론에 반기를 들며 쫓겨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언어학의 대가는 촘스키요, 촘스키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촘스키를 집어들어 열독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만큼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촘스키가 말한 철학의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분석철학의 방법이고, 이는 결국 언어 분석의 방법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분석의 방법이라는 녀석이 몹시 궁금했다. 특히 러셀의 기술구 이론에 대해서 궁금해서 이 책을 구입해 읽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에서 거론하는 철학자들 중에서 프레게와 타르시키를 제외하면 거진 다 영미권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또 프레게는 독일어 화자로 독어는 영어와 매우 흡사하다. 관사(ein, der, etc)를 사용하는 것도 비슷하고, 본래 영어의 뿌리가 서게르만어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 그렇다. 타르스키는 폴란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미국에서 영어로 저술활동과 철학활동을 했을 정도로 사실상 영미권 철학자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언어철학의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다 영미권-서양언어 계통의 인물이 된다.
내가 굳이 이 점을 여기서 상기시켜두는 이유는, 서양언어(eg 영어, 독일어)와 동양언어(eg 한국어, 일본어)의 차이점은 결국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보유하는 이의 이해와 언어철학이라고 기술된 내용을 받아들임에 있어 꽤 큰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책은 번역이 잘 된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나 서양언어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보기에는 더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은 이점을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점이 왜 중요하냐면, 우선 러셀의 한정 기술구 이론 파트를 보더라도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차이를 두고 비한정기술구와 한정기술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이 점은 생소하다. 한국어 모국어 화자중에 "그 태양은 빛난다"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다들 "태양이 빛난다"라고 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un"이라고 하면 안되고 반드시 "the sun"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관사 운용의 차이점이 있다. 한국어의 무관사 명사도 언어학의 pro 개념마냥 관사 역시 숨어있다고 누군가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표층적으로 안 드러난다는 것이고, 한국어나 일본어 화자는 이런 네이티브의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다.
106 page에서 문장이 잘 이어지지를 않았다. 쭉쭉 수월하게 읽히던 문장들이 여기서 막혔다. "개나 유니콘은 방목장에 존재하는 말과 달리 어떤 사람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였다. "아니다?"에서 이상했다. 맥락상 방목장의 말과 달리 유니콘은 허상이다로 나가야했기 때문이다. 앞 뒤 맥락과 연결이 잘 안되어 원문을 찾아보았다. 원문에는 "a dog or a unicorn does not exist in one's imagination in the same way that a horse exists in a paddock."이라 나와있었다. 원문을 보자 바로 이해가 갔다. "아 ~ 그저 방목장에 말이 실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개와 유니콘이 상상속에서 존재하는게 아니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 저자가 상당한 고생을 했다는 점이다. 언어철학 자체가 내용도 어렵거니와, 앞에 말한 서양언어와 한국어의 간극도 커서 그 어려움은 더 증폭된다. 그래서 최대한 오해를 피하려고 원문에 제시된 문장도 번역자는 옆에 조그만하게 많이 달아놨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한국어를 쓰려고 고심한 흔적도 보인다. "살면서 감각 자료를 '정우성'으로 지시해본 적 있는가?" (112page) 문장이 그러했다.
잘된 번역은 독자의 시간과 돈을 아껴준다. 며칠 전 카뮈가 쓴 시지프스 신화에 대한 질 떨어지는 번역을 봐서 화가났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번역서이다. 번역은 절대로 쉽고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번역을 하면 번역자의 한국어 실력, 외국어 실력, 해당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다 폭로된다. 그런점에서 박채연 이승택 번역자 둘은 우리 철학계에 좋은 공헌을 했다. 또 스스로를 입증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 문학계와 철학계는(특히 서양어문계, 서양철학 전공인들) 얼마나 그릇되고 지저분한 번역투 문장들로 번역서들을 도배질해왔는가?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한다.
아직 이 책을 전부 다 완독하지는 못했다. 내용도 만만치 않다. 또 숙고하면서 읽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 숙고란 것이 기실 서두에 말한 한국어-서양어 차이에서 온다는 점을 다시 여기서 상기시켜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결과적으로 언어철학이라는 분야는 서양언어철학 혹은 영어철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나 독일어를 모국어로 태어나지 않은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이런 철학-언어적 말장난은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2020.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