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서 빛이 날 때가 있다. 그 빛은 읽는 이의 눈을 지나 가슴에 뜨겁게 화인을 남긴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쓰기란, 아니,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어느 글에선가 만났던 글귀이다. 2000년 봄, 처음 하이쿠 시집 <한 줄도 너무 길다>를 만나고 시문학에 완전히 문외한인 내가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쳤던 적이 있다. 단지 한 시간 가량 시를 읽어주고 그 시가 보여준 풍경들을 그려봤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아주 쉽게 시를 이해하였고 나로서는 쓸 수 없었던 시들을 써 보여주었다. 굉장히 즐거워하며.
그렇게 처음 하이쿠를 만났던 그때로부터 14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한 줄의 시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수 있는 시들이지만, 시어 들에 담긴 사연과 풍경을 담아낸 류시화 시인의 해설은, 고요 속에 던져진 시어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무늬들처럼 그 깊이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한 줄의 시가 주는 울림을 넘어, 한 편, 한 편의 시에 담긴 따뜻한 시선이 묵직한 책의 무게만큼이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름 몰라도 /모든 풀마다 /꽃들 애틋하여라 - 산푸
지고 난 후에 /눈앞에 떠오르는 /모란꽃 - 부손
부재와 종말은 어떤 것의 존재를 더 절실하게 만든다. 사라진 뒤에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단지 꽃만이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 잇사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 이젠
이 순간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애뜻한 경험이다. 시선은 사물에 흔적을 남긴다고 말한 러시아 시인 브로드스키, 그리고 사물은 우리의 혼에 흔적을 남긴다고 말하는 류시화 시인의 글처럼, 살아있다는 것은 한 편의 시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렇지 않던.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가슴 안에 있는 시를 읽는 것.
이 글귀처럼 한 존재의 가슴 안에 있는 시를 읽는 자는 결코 그를 비난하지 못하리라. 그 시가 주는 울림이 얼마나 깊고 또 아픈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므로. 시는 겉으로 보여지는 존재의 속 깊은 곳을 공명하는 작은 울림이다.
전부를 잃어버린 /손과 손이 /살아서 맞잡는다 - 세이 센스이
지금 이 순간, 살아서,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와 같은 책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그동안 류시화 시인의 시와 번역서를 즐겨 읽던 독자로서 오랜 시간 변함없이 생에 대한 통찰과 인간과 삶에 대한 애뜻한 시선을 담은 시인의 책들을 서재의 한 켠에 둘 수 있음에 감사한다.
첫 만남은 예기치 않게 시작된다. 어느 날 하이쿠가 당신의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당신의 마음과 혼에 스며들기 시작할지도 모른다.